故 구본무 LG 회장이 남기고 떠난 전설의 日 쇼츄 ‘한타바루’... “천사도 만취할 술”
28년을 기다린 그 술이 마침내 오늘 빛을 본다.
1994년 프로야구팀 LG 트윈스는 한국시리즈(KS) 우승을 거머 쥐었다. 정규시즌 1위에 이은 압도적인 승리였다.
LG트윈스 초대 구단주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우승 직후 축하연에서 직접 준비한 일본 쇼츄(焼酎·소주)를 꺼냈다. 전지훈련지였던 오키나와에서 산 아와모리주(酒)였다.
구 회장은 2군 선수 얼굴과 이름까지 외울 정도로 트윈스에 애착과 열정을 보인 것으로 유명했다. 구 회장과 선수단은 ‘돌아오는 해에도 우승하면 이 술로 다시 축배를 들자’고 약속했다.
이듬해 2연패(連霸)에 성공하면 마실 우승 축하주까지 미리 준비했다. 같은 아와모리주, 다만 큰 항아리에 담긴 4리터짜리 세 통이었다.
그러나 1995년 LG 트윈스는 우승에 실패했다. 우승 축하주로 준비했던 거대한 아와모리주를 여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다음 해를 넘어, 2000년대에도, 201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우승을 하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자 해마다 LG 트윈스 전력 분석 기사는 ‘올해 아와모리주를 딸 수 있을 것인가’를 묻는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13일. LG 트윈스는 29년 만에 다시 한국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 LG 트윈스는 17일 서울 마곡 사이언스파크에서 올해 우승 축하연을 연다고 밝혔다. 1995년 샀던 쇼츄는 28년 만에 이 자리에서 열릴 전망이다.
28년 전 구 회장이 구입한 아와모리주는 ‘한타바루(はんたばる)’라는 술이다. 한타바루는 ‘가장자리’라는 뜻을 지닌 오키나와 사투리다. 술을 만드는 양조장 주변 동네 옛 이름에서 따왔다.
한타바루를 만드는 타이코쿠주조(泰石酒造)는 야스다 타이지 사장과 그 가족 셋이 운영하는 양조장이다. 일본 내에서도 어지간한 아와모리주 팬이 아니라면 알기 어려울만큼 조그맣다.
현재 이 술은 우리나라에서 살 수 없다. 이 술을 들여오는 수입사가 없다. 한타바루를 맛보고 싶다면 일본 주류 사이트에서 해외 직구(직접 구매)해야 한다.
일본 내에서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술은 어떻게 LG 트윈스 우승 축하주가 됐을까.
타이코쿠주조는 오키나와 중부 우루마시(市)에 있다. 1952년 이 지역에서 문을 열어 1955년부터 아와모리주를 만들었다.
우루마는 1~2월에도 평균 기온이 19도 안팎이다. LG 선수들과 코치진은 이 곳을 전지훈련지 삼아 1990년대 이후 거의 매년 찾았다. 우루마시는 LG 선수단이 찾아올 때마다 시장과 부시장이 직접 나서 환영했다. 이 전통은 2020년까지 이어졌다.
일본 주류전문 유통사 후지이트레이딩의 이케다 쇼고 주류 부문 마케팅 담당자는 조선비즈와 인터뷰에서 “오키나와는 1950년대 미군이 주둔할 때부터 작은 양조장들이 미군 기지에서 버린 위스키나 맥주병에 직접 만든 술을 담아 파는 문화가 있었다”며 “이런 작은 양조장 가운데 타이코쿠주조는 역사가 깊은 양조장”이라고 말했다.
LG 트윈스는 잠실야구장 구단 사무실에 보관하던 아와모리주 항아리를 2014년 이천 LG챔피언스파크 사료실로 옮겼다.
사료실에 놓인 4리터들이 한타마루 항아리 사진을 보면 상단에 ‘10년’이라고 적힌 노란 스티커가 붙어있다. 노끈으로 둘러쌓인 가운데 레이블에는 거친 글자체로 한타바루, 장기저장, 쿠스(古酒)라고 적혀있다.
쿠스는 오키나와에서 3년 이상 묵힌 원액으로 만든 아와모리주를 말한다. 이 술은 노란 상단 스티커에 붙은 대로 이미 10년을 숙성한 아와모리주기 때문에 쿠스라는 이름을 붙일 자격을 얻었다.
10년 숙성 쿠스 아와모리, 그것도 4리터짜리 항아리에 담겼다면 값이 상당히 비쌀 거라 예상하기 쉽다.
다만 아와모리는 위스키처럼 오래 묵혔다고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지 않는다. 술을 빚는데 드는 비용이 일본 본토나 스코틀랜드, 프랑스 보르도 같은 곳에 비해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오키나와는 애초에 물이 잘 빠지는 석회암 지대라 쌀 농사에 적합하지 않다. 쇼츄를 만드는 쌀 역시 가깝게는 인근 규슈(九州) 지역에서, 멀게는 태국에서 수입해 온다.
인구 당 소득은 일본 기준 최하위고, 실업률 역시 최악이라 노동력도 풍부하다. 여기에 오키나와산(産) 주류는 일본 본토 주류보다 주세를 35% 적게 내 가격 경쟁력도 높다.
특히 한타바루는 엄밀히 말해 100% 아와모리주는 아니다.
오키나와는 연중 내내 덥고 습하다. 이 기후 탓에 발효 중인 누룩이나 술이 썩기 쉽다. 전통 아와모리주는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증류에 들어가기 전 밑술을 짧고 빠르게 만든다. 다만 이렇게 만든 아와모리주는 맛이 진하고 자극적이다.
한타바루는 대중적인 입맛을 공략하기 위해 증류식 소주에 해당하는 전통 아와모리주에 일반 희석식 소주를 섞어 만든다. 이렇게 만들면 가격이 저렴해지는 동시에, 목넘김이 더 부드러워진다.
구 회장이 샀던 한타마루와 유사한 제품은 현재 일본 현지에서 720밀리리터 1병에 약 2만5000원 정도에 팔린다.
전문가들은 증류주 특성 상 실온에서 30년 가까이 보관했어도 마시는 데 큰 지장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병에 넣을 당시 30도가 넘어가는 증류주는 세균 번식이 어렵다. 벽장 속에 오래 보관한 술이 상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양은 현저히 줄고, 도수 역시 이전보다 낮아졌을 가능성이 크다.
주류업계에서는 보관 중에 증발한 술을 ‘천사의 몫(angel’s share)’이라고 부른다. 보통 추운 지역에서는 연 평균 2%, 더운 곳에서는 5% 정도가 매년 천사의 몫으로 날아간다. 도수 역시 서늘한 지역에서는 연 평균 0.5도 가량 비선형적으로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
한국베버리지마스터협회 관계자는 “항아리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숨구멍이 뚫려있고, 이 술은 뚜껑도 밀봉돼 있지 않아 천사가 마시고 취했을 정도로 증발한 양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LG 트윈스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차명석 LG 트윈스 단장은 최근 언론과 인터뷰에서 “몇 년 전에 세 통에 있던 소주를 한 통으로 합쳐 현재 (한 통을 기준으로) 4분의 3 정도가 남았다”며 “이 정도로는 부족할 것 같아 한국시리즈 전에 일본에서 두 통을 더 사왔다”고 말했다.
17일 우승 축하연은 비공개로 열린다. 구 회장이 남기고 떠난 술 맛은 선수단만 알 수 있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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