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철주의 옛 그림 이야기] 단 한번 만나 평생 곁에 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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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사우'는 종이·붓·먹·벼루를 아우르는 말이다.
예부터 종이는 고려지, 붓은 황모필, 먹은 송연묵, 벼루는 단계연이라 했다.
벼루에 먹을 갈 때는 '열여섯살 처녀가 삼년 병치레 끝에 일어나 미음 끓이듯 갈아라'라는 속설처럼 조심조심, 애지중지 다뤄야 한다.
병실 곁에 놓인 김치 항아리가 조선 청화백자인 줄 금방 알아냈고, 환자의 소변을 담은 병이 진기한 도자기임을 눈치채고 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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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두마리 자태가 시선 붙들고
자줏빛 바탕색엔 기품 감돌아
작품 사랑한 수집가 안목 빛나
‘문방사우’는 종이·붓·먹·벼루를 아우르는 말이다. 이 네가지도 품질을 따진다. 예부터 종이는 고려지, 붓은 황모필, 먹은 송연묵, 벼루는 단계연이라 했다. 문방사우를 가려 쓰는 선비의 안목이 만만치 않다.
벼루는 그중 으뜸으로 친다. 종이는 구겨지고 붓과 먹은 닳는 데 비해 오랜 쓰임새를 자랑하는 게 벼루다. 벼루에 먹을 갈 때는 ‘열여섯살 처녀가 삼년 병치레 끝에 일어나 미음 끓이듯 갈아라’라는 속설처럼 조심조심, 애지중지 다뤄야 한다.
벼루에 따를 물을 담아놓는 연적은 어떤가. 선비들은 연적의 품질보다 형태를 따졌다. 고려 때 청자나 조선 때 백자로 만든 연적은 형태가 참 별나다. 잉어나 붕어 모양이 있는가 하면 복숭아·호박이 있고 두꺼비·용·다람쥐·원숭이·닭도 나온다. 산이나 집 모양에다 신선처럼 빚은 것도 보인다. 만들고 싶은 대로 까짓것 다 만들어 썼다. 싫증 나면 다른 생김새로 바꾸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늘 곁에 있어도 질리지 않고 앙증맞은 연적 하나를 구경해보자. ‘백자 양각(陽刻) 동채(銅彩) 쌍학(雙鶴)무늬 연적’이다. 학 두마리가 부리를 벌리고 입 맞춘다. 그것도 성에 덜 차 날개 끝을 마주 비비며 춤춘다. 사랑에 흠뻑 빠진 모습이다.
우미(優美)한 기품을 품어내는 이 19세기 연적은 보는 이마저 덩달아 입이 벌어지는 명품이다. 무엇보다 바탕색이 오죽 고운가. 연적 몸통은 화사한 자줏빛 구리 안료를 칠해 뽐을 냈고, 돋을새김이 된 학은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백자유로 치장했다. 펼친 날개 아래 입을 볼록 내민 곳이 물구멍이다.
기발한 디자인에 선명한 색상 대비와 손에 잡히는 맞춤한 크기, 어느 것 하나 식상할 구석이 없는 도자기 아닌가. 구리 안료는 옛날부터 비쌌다. 포도나 모란꽃 문양 등이 있는 도자기를 보면 구리 안료는 일부에 살짝 칠한 것이 대부분인데 이 연적은 된통 선심을 썼다. 선비의 고아한 호사 취미가 있었기에 이런 귀티 나는 공예품도 태어났으리라.
이 연적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이는 박병래 선생이다. 1930년대 성모병원 초대 원장을 지낸 그는 일본 의사가 보여준 조선 접시를 우리 것이 아닌 것으로 착각했다가 나중에 안 것이 부끄러워 40년간 도자기 공부와 수집에 열중했다는 분이다. 평생 개업하지 않은 의사로 살면서 봉급을 쪼개 도자기를 사 모은 그는 타계 두달 전 300점이 넘는 애장품을 박물관에 넘겼다.
돈 쌓아놓고 기다린다고 명품이 제 발로 오지는 않는다. 선생은 주인도 모르는 그릇의 가치를 기민한 눈썰미로 가려냈다. 병실 곁에 놓인 김치 항아리가 조선 청화백자인 줄 금방 알아냈고, 환자의 소변을 담은 병이 진기한 도자기임을 눈치채고 사들였다. 냉면집 젓가락통이 귀한 백자 필통이라서 탐을 내 만지작거리는 바람에 주인이 냉큼 치워버린 일도 있었다. 1·4 후퇴 때 마당에 구덩이를 파고 소장품을 모래로 채워 보관했다는 그의 회고를 들어보면 뼛속 깊이 파고든 미술 사랑이 눈에 선하다.
미술품 수집 요령을 설파하는 전문가는 많다. 그나마 솔깃해지는 말은 ‘첫사랑 같은 작품을 골라라’ 하는 것이다. 첫사랑은 두번 오지 않는다. 한번의 기회, 한번의 만남에서 평생 곁에 둘 미술품을 고를 줄 알아야 빼어난 컬렉터가 된다.
다른 나라 컬렉터들의 조언도 비슷한 맥락이다. ‘바로 그것 없이는 못 살겠거든 사라.’ 선생의 첫사랑은 풋사랑이 아니었기에 두고두고 사랑받는다.
손철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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