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토니아 숲이 지은 집...나무로부터 얻은 것 [집 공간 사람]
편집자주
집은 ‘사고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북유럽 에스토니아의 광활한 숲에 가을볕이 스미기 시작한 지난 10월, 북부 티스크레의 조용한 주택가를 찾았다. 아름드리나무 사이로 드문드문 자리한 주택들은 담이나 울타리 뒤에 숨지 않고, 하나같이 활짝 개방됨으로써 풍경에 녹아들었다. 칼 한스 아락(50)의 '티스크레 하우스'(건축면적 216㎡, 연면적 261㎡)도 그랬다. 병풍처럼 늘어선 각양각색의 나무와 청둥오리가 노니는 연못을 향해 열린 집에선, 주택가 한가운데임에도 외딴섬처럼 고적한 분위기가 났다.
이 집에는 아락 부부와 두 명의 자녀, 고양이 네 마리가 산다. 정보기술(IT) 엔지니어인 부부는 업무 특성상 밤낮없이 일하고 여행을 수시로 다녔다. 이동이 빈번한 라이프스타일에는 아파트가 제격이었지만 2세 계획이 생기면서 주택을 짓기로 했고, 가까운 주택가를 살피다 이끌리듯 지금의 집터를 만났다. "수풀이 우거지고 야생 연못까지 있어 방치된 땅이었어요. 처음 본 곳이었지만 익숙한 느낌을 받았죠. 자연과 함께하는 일상이 이어지고, 그런 생활이 태어날 아이들에게 든든한 거름이 될 수 있겠다 싶었지요."
숲과 집 사이, 안전한 쉼터
처음부터 중요했던 포인트는 자연이었다. 무려 1,000평(3,016㎡)에 이르는 대지에는 온갖 나무가 즐비하고 계절마다 다른 철새가 거쳐가는 연못까지 있었다. "자연은 집보다 훨씬 앞서 존재했잖아요. 길들여지지 않는 숲을 있는 그대로 누리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서 집과 경계를 짓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구체적인 아이디어는 없었지만 그런 바람을 얘기했고, 결국 방법을 찾았어요."
설계를 맡은 스리플러스원 건축사사무소(3+1 architects)가 고심 끝에 내놓은 안은 바로 '덱(deck)'이었다. 건축가는 부부와의 첫 미팅에서 박공지붕이 있는 정육면체 건물에서 4분의 1을 떼어낸 독특한 디자인을 떠올렸고, 직각으로 잘린 두 단면 사이에는 높이가 다른 목재 덱을 설치해 입체적인 외부 공간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덱 주변으로는 주요 생활공간을 배치했다. 덱과 면한 한쪽 벽은 다양한 생활이 펼쳐지는 다이닝 공간으로 통하고 다른 쪽은 부부 침실, 사우나실과 맞닿았다. 두 면엔 통유리 슬라이딩 도어를 설치해 집 안 어디서든 마당을 바라보거나 드나들 수 있게 했다.
"두 개의 동선이 서로 부딪치지 않고 마당을 독립적으로 향유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는 설계 의도대로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공간이 구분되면서도 덱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교류하는 모습이었다. 덱의 중앙을 차지한 것은 사우나실이다. 사우나 문화를 즐기는 여느 에스토니아인처럼 부부 역시 가장 개방된 공간에 사우나실을 배치했다. 트인 풍광을 보며 사우나를 하다가 어느 때고 밖으로 나와 자연에 취하기 위함이다. "어느 공간에서든 자유롭고 편안하게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혜택이죠. 한겨울만 제외하곤 문을 열어 놓고 살아요. 아니, 덱에서 살고 있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자연스럽게 일상과 자연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걸 느껴요."
나무집에서만 누리는 감각
집의 중심을 숲으로 두면서 주재료도 콘크리트가 아닌 나무로 정했다. 집에 들어서면 과한 장식과 화려한 컬러를 배재한 모던한 디자인과 목조 건물에서 느낄 수 있는 은은한 나무 내음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에스토니아 건축시공 회사인 파마틴(Palmatin)이 주도한 내부 마감은 브라운과 그레이, 블랙 컬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아 조화로운데 특히 나무의 물성이 내부 인테리어의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한다.
직각과 수직으로 마름질된 천장은 이 집의 시그니처. 박공지붕의 꼭짓점에서 내려오는 직선적이고 고고한 나무 천장에서는 가정집에서 쉽게 경험하기 힘든 강한 오라가 풍겼다. 그뿐이랴. 천장을 뒤덮은 나무는 다름 아닌 가문비나무. 메마른 땅에서 서서히 알차게 자라는 덕분에 단단하고 울림이 좋아 바이올린 같은 악기를 만들 때 쓰는 목재다. "노래하는 나무로 마감해서 집의 소리가 남달라요. 아주 작은 소리도 크게 울려서 간혹 불편할 때도 있지만 음악을 들으면 비교할 수 없이 좋지요. 음향만 보면 콘서트를 열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예요."
나무로 채운 공용 공간이 건축주의 표현대로 '교회처럼 웅장한 공간'이라면 복도를 지나 당도하는 1층 안방, 계단을 올라 마주하는 2층 작업실은 작은 별천지다. 안방 통창의 프레임에는 이 집의 자랑인 야생 연못 풍경이 그림처럼 담기는데 마치 자연 한가운데로 들어와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남편이 재택근무를 하는 2층 오피스는 작은 천창으로부터 빛이 은은하게 들어와 마치 동굴에 들어온 듯 아늑하다. 아락은 "지극히 단조로운 일상이지만 그 속에서도 공간에 따라 다양한 재미와 의미가 만들어진다는 걸 알게 됐다"며 "상상했던 모든 것이 가능한 집"이라고 소개했다.
숲과 나무가 주는 지혜
자연으로 넉넉하게 열린 공간이자 가장 사적인 은신처와 일터가 공존하는 집에 살아온 지 4년째. 평생 디지털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건축주는 오감이 부딪치는 숲집에서 더없이 소중한 아날로그적 기쁨을 느끼고 있다. 아락은 "간혹 지인들을 불러서 파티를 열기도 하지만 가장 좋은 순간은 고요하게 머무르는 시간"이라며 "이 집을 짓고 살면서 오랜 꿈에 가까이 다가선 느낌"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도 나무에 영혼이 있고, 숲에 정령이 산다고 믿는 에스토니아인들에게 숲은 그 자체로 문화이자 유산이다. 그런 그들에게 숲집을 짓고 산다는 건 정령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일에 다름 아닐 테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다양한 레이어로 담기는 자연을 보며, 티스크레 하우스의 집주인도 어쩌면 오랜 신화의 조각들을 읽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집의 모든 공간이 좋아요. 나무와 숲이 일상과 사유의 반경에 가까이 있다는 건 지금 같은 시대에 행운이죠. 평생 이 집에서 살다가 마지막 순간 평온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티스크레(에스토니아)= 손효숙 기자 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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