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 '기도의 창가에서'] 저무는 11월에 - 턴 투워드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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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보다도 가까이 죽음을 묵상하는 달인 십일월이 되니 성당 앞의 느티나무 잎사귀도 다 떨어지고 며칠 전 내린 비로 인해 나뭇잎들이 이별의 흐느낌처럼 바닥에 깔려있습니다.
성당 앞 게시판엔 일생을 한국에서 보낸 어느 독일인 수사님의 부고가 붙어있는데 환히 웃고 있는 그분의 사진을 보니 마음이 짠합니다.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과 그 가족들의 모습이 함께 생각나며 그들의 숨은 희생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간절한 기도의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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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무는 십일월에 한 장 낙엽이 바람에 업혀 가듯
그렇게 조용히 떠나가게 하소서
(…)
죽은 이를 땅에 묻고 와서도 노래할 수 있는 계절
차가운 두 손으로 촛불을 켜게 하소서
-‘순례자의 기도’에서
어느 때보다도 가까이 죽음을 묵상하는 달인 십일월이 되니 성당 앞의 느티나무 잎사귀도 다 떨어지고 며칠 전 내린 비로 인해 나뭇잎들이 이별의 흐느낌처럼 바닥에 깔려있습니다.
성당 앞 게시판엔 일생을 한국에서 보낸 어느 독일인 수사님의 부고가 붙어있는데 환히 웃고 있는 그분의 사진을 보니 마음이 짠합니다.
얼마 전엔 동기 수녀님 한 분이 허리가 아파 병원에 갔다가 암세포가 전신에 퍼져 더 이상의 치료도 못 받고 퇴원해 병실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안타깝던지요.
이래저래 아픔과 죽음의 소식을 많이 접하니 우울해지기도 하는 요즘, 세상 떠난 친지들의 모습이 부쩍 더 그리워지곤 합니다.
며칠 전 제 어머니의 꽃골무를 어느 공동 방에서 발견하곤 그리움에 왈칵 눈물이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2.
수녀원 묘지에 올라가 더 자주 연도를 바쳐야지 다짐해 보는 11월.
어제(11월 11일)는 아주 오랜만에 부산 남구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에 가서 유엔참전용사 국제 추모의 날 기념식에 참석했습니다.
그곳의 추모명비에도 일부가 새겨진 저의 추모 시를 직접 낭송하는 영광을 누렸지요. 은은한 첼로 연주에 맞추어 낭송을 하는데 분위기 때문인지 몇 줄 안 되는 시의 무게가 대단히 크게 느껴지고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깊은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과 그 가족들의 모습이 함께 생각나며 그들의 숨은 희생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간절한 기도의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어떻게 님들을 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님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꽃다운 나이에 전쟁터에서
함께 싸우다 함께 스러진 슬픈 님들이여
아직도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이 조그만 나라 위해
목숨까지 바친 고마운 님들이여
지금은 이 낯선 땅 돌 위에 새겨진 님들의 이름을
바람과 파도가 불러줍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정다운 별로 살아오는 님들
지지 않는 그리움이여
우리의 조국에 님들의 이름을 사랑으로 새깁니다
우리의 가슴에 님들의 이름을 감사로 새깁니다.
-‘님들의 이름을 감사로 새깁니다’ 전문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시낭송에 대한 인사를 하며 사진찍기를 요청하던지 부끄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쁜 마음이었지요.
사랑은 희생의 열매임을 눈으로 다시 확인한 뜻깊은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
이기심의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이타적인 사랑의 힘을, 죽음을 뛰어넘는 인류애를 묵상해 보는 날이었습니다.
6·25 한국전쟁 당시 저는 부산으로 피란 온 만 5살 어린소녀였는데 그 많은 피란민들에 기꺼이 방을 내어준 부산 사람들의 가족적인 환대를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른이 된 지금 부산 광안리에 있는 수녀원에서 반세기 이상을 살아오면서 제 마음은 늘상 부산을 향해 있고, 사랑과 감사를 잊지 않고 새롭게 키워가는 부산 사람, 부산 예찬론자입니다.
일상의 길 위에서 어떤 사소한 일로 마음이 닫히고 꽁해져서는 안 되겠다.
매사에 좀 더 넒고 큰 마음의 사랑을 키워가는 형제애, 인류애를 키워가야겠다는 결심을 더 새롭게 한 ‘턴 투워드 부산 (Turn toward Busan) 11월 11일, 저의 여생 또한 턴 투워드 부산이 되길 겸손 되이 발원해 본 고마운 날이었습니다.
3.
한 주검을 깊이 애도하기도 전에
또 다른 주검이 보도되는 비극에도
적당히 무디어진 마음들이 부끄럽습니다
하늘에서 땅에서 강에서 바다에서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우리 기족과 이웃들을 굽어보소서
…자신의 아픔과 슬픔은
하찮은 것에도 그리 민감하면서
다른 사람의 엄청난 아픔과 슬픔엔
안일한 방관자였음을 용서하소서
…나 아닌 그 누군가가 먼저 나서서 해주길 바라고 미루는
사랑과 평화의 밭을 일구는 일
비록 힘들더라도 나의 몫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참됨과 선함과 아름다움의 집을
내가 먼저 짓기 시작하여
더 많은 이웃을 불러 모으게 하소서
-시 ‘우리를 흔들어 깨우소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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