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우리에겐 듣지 않을 권리도 있다
굉음만이 소음인 것은 아니다
정치 비방 현수막 내리듯
‘청각 공해’ 줄일 방법도 찾아야
‘아파트 사자후’라는 인터넷 밈(meme·우스개)이 있다는 걸 최근에 알았다. “야!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하라!” 이 처절한 외침은 아파트 이웃 반려견 소리를 참다 못 해 한 남성이 토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수 뺨치는 성량과 호소력의 ‘원본’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온 2011년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패러디와 2차 창작이 이어지고 있다. 재능 있는 이들이 이것을 멜로디로 변환해 기타와 피아노로 연주했고 전자음악(EDM) 리믹스도 나왔다. 보컬 트레이너가 음역대와 발성을 조목조목 분석하는 영상도 있다.
밈은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생물학적 유전자(gene)에 대응하는 문화 유전자라는 의미로 만든 용어다. 애초에 복제와 전파를 전제하고 있긴 하지만 하나의 밈이 10년 넘게 생명력을 유지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다. 댓글 창의 분위기에서 비결을 짐작할 수 있었다. “층간 소음 들릴 때 크게 틀면 효과 직빵.” “우리 아파트도 개 짖는 소리 때문에 미치겠어요.” 누구나 불쾌한 소리에 시달려 본 경험이 있다. 괴로웠던 그 기억이 소음에서 비롯된 분노와 공명한 것이다.
못 볼 꼴 앞에선 고개를 돌리기라도 하겠지만 소리는 그럴 수 없다. 청각은 무차별적인 감각이다. “거리가 떠나갈 듯한 볼륨으로 음악을 트는 것은 음악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는 공격적인 행동에 가깝다. 가청 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좋건 싫건 들어야 하고 마음의 평화는 깨져버린다.”(다이앤 애커먼 ‘감각의 박물학’)
광화문 거리를 걷다 보면 마음의 평화가 깨지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 목청으로 뽑힌 게 아닐까 싶었던 어느 정당의 당직자가 집회 무대에서 스피커가 찢어져라 악을 쓰던 날, 말 그대로 귀를 막고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들을 봤다. 예수 천국 트럭의 확성기에서 나오는 “회개하라” 방송이 세종로 사거리에 울려 퍼질 땐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는 무력함에 화가 치밀었다. 가까운 사이여도 정치와 종교 얘기는 조심스럽기 마련인데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거리낌 없이 내지른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굉음이 아니라는 이유로 소음 취급도 못 받는 소리들은 아직 그것이 문제라는 의식조차 없는 것 같다. 공원에 가면 스마트폰 소리가 밖으로 들리도록 틀어놓은 사람들을 자주 본다. 내가 듣는 것은 좋은 음악이고 중요한 뉴스라서 괜찮다는 걸까. 출근길 버스에 오를 땐 스피커부터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됐다. 아무것도 틀어놓지 않은 날은 운이 좋은 날이다. 내 취향이 아닐지라도 음악만 나오는 날은 그나마 낫지만 정치인들이 라디오에 나와 열을 올리는 날은 아침부터 피곤해진다.
지하철에선 “모두가 힘들지만 나보다 더 힘드신 분들을 위한 배려는 우리 모두를 기분 좋게 한다”며 자리 양보를 권유하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양보할 사람은 방송이 없어도 양보하고 모른 척할 사람은 방송이 나와도 모른 척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신체 접촉을 하지 마라’ ‘CCTV로 찍고 있으니 조심해라’ ‘통화는 조용히 해라’로 역마다 이어지는 방송을 묵묵히 들을 때, 나는 지하철 타면서 왜 착하게 살라는 훈계까지 들어야 하는지 궁금해진다.
며칠 전 퇴근길에 거리 풍경이 왠지 차분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살펴보니 건널목을 뒤덮었던 정치 비방 현수막이 줄어들어 있었다. 아직 남아 있는 현수막도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한결 새롭게 느껴졌다. 그 장면은 우리가 만들어낸 감각 공해를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처럼 보였다. 시각뿐 아니라 청각에 대해서도 고민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겐 자유롭게 말할 권리만큼 소중한, 듣지 않을 권리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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