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퉁이 돌고 나니] 계절이 끝나가는 때의 감사

이주연 산마루교회 목사 2023. 11. 1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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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에 놓여진 국화 화분/산마루 교회 제공

쪽방촌 비탈 골목길의 햇살도 가을이 끝나간다. 언덕 아래에서 용환(가명) 형제가 전동 휠체어를 신나게 몰고 올라온다. “목사님, 언제 오셨어요?” 손을 번쩍 들고 반긴다. “온다 했으면 기다려야지, 어디를 다녀와요!” “예, 사우나에 갔다 와요!” 얼굴이 환하다. 그의 웃음은 나에게는 늘 큰 선물이다. 그는 독립문공원에서 노숙을 수년간 하다가, 한동안 공동체에 머물면서, 성경을 공부했다. 그는 버거씨병으로 두 다리를 자르고, 팔도 오른쪽뿐이다. 그 몸(?)으로 과연 누가 대중목욕탕을 갈 수 있으랴! 그는 남들의 이목에 상관없다. 온 세상이 뭐라 하든 상관이 없다. 항상 웃는다. 늘 입에 달고 산다. “목사님 나 괜찮아요! 하하하.”

오늘은 내가 물었다. “국화 잘 길러요?” “그럼요! 물 잘 주고 있어요! 염려 마세요. 하하하.” 골목길이 삭막해서 국화 화분 10여 개를 선물했다. 그리고 그에게 일주일에 두 번 물을 주라고 했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급경사를 오르내리며 국화를 잘 돌본 것이다. 작은 일일지라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가을 기쁨을 선물하고 싶어서 한 일이다. 이 골목길에선 몇 주가 지나도 한 개의 화분도 없어지지 않았다.

나는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도 감사하자고 했다. 노숙하거나 노숙했던 분들에게 감사할 이의 이름과 사연을 써내면 선물비를 1만원씩 드리겠다고 했다. 은행에서 신권을 준비했다. 써 낸 내용을 보니, “제 말을 잘 들어주어서” “내 마음을 알아주어서” “외로움을 달래주어서, 감사”…. 따뜻한 양말, 따뜻한 음료, 장갑 등을 선물하겠다고 한다. 뜻밖에 반은 교역자들에 대한 것이었다. 고맙지만 의도와 달라 교역자에게는 다음에 하고, 다른 이들을 다시 써 내도록 했다. 그중 감동시킨 것은 “좋은 설교 말씀으로 힘을 주어서” 백합 한 송이를 선물하겠다는 것이다. 어렵고 힘이 들어도 교회에 나오는 것은 진리의 말씀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사람은 그 누구도 결코 빵으로만 살 수 없다. 인간은 진리와 사랑으로 영혼의 만족이 있어야 사는 것이 아닌가! 지금 우리는 노숙인일지라도 주일 예배자에게는 현금을 주지 않는다. 그 누구도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평창 산골짜기 공동체에 중형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약속도 없이 저녁 무렵 나타났다. 군청에서 평생 공무원을 하다가 퇴직하신 분이었다. 반가워 뛰어나갔더니 “목사님, 사과 좀 가져왔어요. 그냥 막 담아왔어요.” 재래종으로 미세영양소가 최고라는 이야기를 하더니, 막 따서 차에 가득 박스에 담아온 것이다. “감사합니다. 고생해서 키웠는데 파셔야지요!” “아, 내가 현직에 있을 때 도와드렸어야 하는데, 그땐 어떤 일 하시는지 몰랐어요! 뭐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하하하.” 차 한 잔 나누고 떠나는 뒷모습이 끝나가는 가을의 큰 선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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