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한계 돌파하려 했던 기획자”

김진형 2023. 11. 17.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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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추억 없다/찰나 찰나 연소할 뿐/하얀 절망의 재도 한땐 창창한 나의 추억이었으리라"(진이정 시 '추억 거지' 중) 춘천 출신 진이정(1959∼1993·사진) 시인은 1993년 11월 19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번 추모공연을 기획한 최창근 연출가는 "생전 어렵게 살다가 세상을 떠난 시인의 사후에도 그를 추모하는 행사가 번듯하게 열린 적이 없었다. 독자들이 진이정의 세계를 함께 나눴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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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출신 진이정 시인 30주기
18·19일 서울 추모공연 개최
동인 함성호·함민복 시인 대담
“전통·불교 기반 전위적 시도”

“내겐 추억 없다/찰나 찰나 연소할 뿐/하얀 절망의 재도 한땐 창창한 나의 추억이었으리라”(진이정 시 ‘추억 거지’ 중)

춘천 출신 진이정(1959∼1993·사진) 시인은 1993년 11월 19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서양의학에 대한 불신으로 자연 치유 능력을 끝까지 실험했고, 결국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시인의 유해는 서울 성북동의 작은 절인 적조사에 뿌려졌다. 문단에서는 동시대 요절시인 기형도와도 비교되지만 문학관이 세워진 그와 달리 진이정에 대한 추모 규모나 양상은 사뭇 다르다. 올해 나올 예정이었던 진이정 시인의 전집 발간도 미뤄져 숙제로 남아있다.

진이정 시인의 작고 30주기를 맞아 그의 넋을 기리는 추모 공연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가 오는 18·19일 오후 3시 서울 하제의숲에서 열린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작고문인선양사업 선정작으로 극단 제비꽃이 진이정의 작품을 공연과 낭독극으로 선보인다. 1990년대 초반 진이정과 함께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한 속초 출신 함성호 시인과 함민복 시인이 진이정과의 기억을 회고한다.

34세로 요절한 진이정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춘천역 인근 큰집에서 양자로 살았던 점은 시인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줬지만, 초등학교를 마칠 때쯤 이주했다는 것 외에는 춘천과 관련된 내용을 추적하기 어렵다.

진이정은 판소리와 불교,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긴 호흡으로 새로운 예술을 펼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특히 전통문화의 가능성을 찾고자 만신 김금화 무당을 만나는 등 전국 굿판을 떠돌아다녔다. 하지만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인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에서는 굿판이 좀처럼 쉽게 보이지 않는다. 전통적 요소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숨겨야 한다는 관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추모 공연에 앞서 함성호·함민복 시인에게 진이정에 대한 기억을 물었다.

함성호 시인은 진 시인의 작품세계에 대해 “불교적인 허무를 일상과 연관시켜 뾰족하게 드러내는 일은 어렵다”며 “허무에서 욕망을 끌어냈다는 점이 특출나게 보인다. 빛을 발할 수 있는 시간이 없어 아쉽다”고 말했다. 함 시인은 진이정을 예술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돌파하려 했던 다재다능한 기획자로도 기억한다. 영화감독 유하, 안판석, 김성수 등과 함께 ‘반영화’ 동인을 결성해 직접 조언을 전하는 등 강한 영향력을 주고 받았다. 21세기 전망 동인은 단순히 시 문학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수용을 고민했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진이정은 이데올로기가 해체되던 시기, 문화운동에 대한 전망을 깊이 고민했다. 합평회를 할 때면 겸손하면서도 학구적인 면모를 보여줬다고 한다. 때로는 “짭쪼름한 시를 써왔지”라며 농담을 던졌다.

시인의 본명은 박수남이다. 짝사랑했던 여성 이름을 필명으로 썼다는 풍문도 있지만 함민복 시인은 그가 관심을 가졌던 주역에서 ‘이정’을 발견한 것은 아닌가 추측한다. ‘원형이정’은 주역의 건괘에서 유래된 말로 ‘만물이 처음 생겨나서 자라고 삶을 이루고 완성되는, 사물의 근본 원리’를 뜻한다. 필명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그는 2000년대 이후 시인들에게 ‘진정한 이정표’가 됐다.

함민복 시인도 “진이정의 시는 산문시 같으면서도 행간의 절제와 이미지의 증폭을 보여준다. 기형도가 보여준 낯섦이 있지만 진이정 역시 그 나름의 세계가 있는 것 같다”며 “현재 젊은 시인들이 쓰고 있는 전위적인 시를 앞서갔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번 추모공연을 기획한 최창근 연출가는 “생전 어렵게 살다가 세상을 떠난 시인의 사후에도 그를 추모하는 행사가 번듯하게 열린 적이 없었다. 독자들이 진이정의 세계를 함께 나눴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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