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읍참마속 좋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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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기사에서 줄곧 잘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읍참마속(泣斬馬謖)’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참 어려운 어휘입니다. 여기서 ‘마속(馬謖)’이라는 것은 오래 전 중국의 인명인 고유명사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언론은 온 국민이 이미 삼국지를 읽었다는 전제하에 ‘읍참마속’이나 ‘도원결의’ ‘고육지계’ ‘출사표’ ‘단기천리’ 같은 말을 별 설명 없이 즐겨 쓰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읍참마속’은 특히 혁신이나 쇄신 같은 분위기에서 기존의 인력을 내쳐내는 분위기에서 잘 쓰입니다.
사실 이것은 요즘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9년(1733), 임금은 잇따른 상소 앞에서 진노하며 네 글자의 고사성어를 인용한 뒤 “나는 참아 온 적이 많았다(여즉인지자다의·予則忍之者多矣)”고 토로합니다. 그 네 글자는 무엇이었을까요. 네, 바로 ‘읍참마속’이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미 우리 고전에서도 수없이 인용되고 회자된 고사성어를 두 가지나 남긴 중국인 형제가 있었습니다. 서기 3세기 삼국지의 시대, 촉한 유비 진영의 마량(馬良)과 마속 형제였습니다. 우선 맏형인 마량의 눈썹 가운데 흰색 털이 있었다는 데서 ‘백미(白眉)’란 말이 나왔고, 그 동생 마속은 ‘읍참마속’이라는 불멸의 고사성어에 그 이름이 포함됐습니다. 그 때문에, ‘속(謖)’이라는 결코 쉽지 않은 글자까지도 고유명사로서는 이례적으로 숱한 사람들이 온갖 시험에 나오면 쓸 줄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얘기는 과연 진짜였을까요? ‘울며 마속을 베다’란 고사 역시 소설 ‘삼국지연의’ 속 허구는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진수(陳壽)의 정사(正史) ‘삼국지’ 촉서(蜀書)의 동유마진동여전(董劉馬陳董呂傳)을 보면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어느 정도 사실이었습니다.
‘재주와 그릇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군사전략을 논의하기를 좋아해(재기과인 호론군계·才器過人 好論軍計), 승상 제갈량(諸葛亮)이 그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이 ‘재기과인’이란 네 글자에는 어딘가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일찍이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군자불기(君子不器)’와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어기(語氣)가 그곳에 서려 있기 때문입니다. 군자는 그릇이 아니고, 지나침은 모자람이나 마찬가지. 그런데 그릇이 지나치다고? 몹시 불안합니다. 예전 재승박덕(才勝薄德)이라 묘사되던 어느 정치인도 생각나고요.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황제인 유현덕이었으니, 그는 임종 때 제갈량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속은 말이 실질을 넘고 있어 크게 써서는 안 된다(마속언과기실 불과대용·馬謖言過其實 不可大用).” 언(言)이 실(實)을 뛰어넘는다면 그 잉여분은 가장 절박할 때 위(危)로 표출되기 마련인 것이겠죠.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저 충절의 화신 제갈공명이 주군의 말을 가볍게 간과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소설 ‘삼국지’에선 마치 공명이 주군의 유지를 까맣게 잊어버린 듯한 것처럼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정사의 기록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양유위불연·亮猶謂不然)는 것입니다. 주군의 마지막 영(令)에 대해 공명은 항명했던 것으로 봐야죠. ‘마속만큼은 당신보다 내가 더 잘 안다.’
이후 제갈량의 편애를 얻은 마속은 촉에서 승승장구합니다. 배송지 주에 의하면 제갈량의 남만(南蠻) 정벌 때 저 유명한 칠종칠금(七縱七擒)의 계책도 마속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정사의 기록을 더 보죠. ‘마속을 참군(參軍)으로 임명했다. 불러서 담론할 때마다 대낮에 시작하면 한밤에 끝나곤 했다. 건흥(建興) 6년(서기 228)에 제갈량은 기산(祁山)으로 출병했는데, 이때에 숙련된 장군 위연(魏延)과 오일(吳壹) 등이 있어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이들로 하여금 마땅히 선봉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마속을 발탁해, 대군을 인솔해 앞에 서도록 했다.’
제갈량이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묵살한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위(魏)나라 장수 장합과 가정(街亭)에서 싸웠는데 장합에게 격파돼 사졸이 뿔뿔이 흩어졌다. 제갈량은 전진하여 의지할 곳이 없어졌으므로 군대를 물려 한중(漢中)으로 돌아왔다.’
제갈량이 기산으로 우회시켜 출병한 것에 대해선 후대의 전략가 사이에서 논란이 많았고, 애당초 무리한 전술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여기서 제갈량이 퇴각할 때 위나라 군대를 앞에 두고 문루 위에서 거문고를 타는 ‘블러핑’ 전술로 적을 물리쳤다는 ‘삼국지연의’의 이야기는 픽션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만) 하지만 가정전(戰) 패배의 결정적인 원인이 마속이 군율(軍律)을 어긴 데 있었다는 것은 같은 책 제갈전(諸葛亮傳)의 기록에도 분명히 보입니다.
한중(漢中)으로 물러난 제갈량은 군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마속을 처형합니다. ‘마속은 투옥됐다가 사형당했다. 제갈량은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속하옥물고 양위지유체·謖下獄物故 亮爲之流涕).’ 이때 마속의 나이는 39세였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참으로 애석한 것은 현대에 와서 이 ‘읍참마속’이란 말을 남발하다 못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에 갖다 쓰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첫째, 이 말이 토사구팽(兎死狗烹)과 혼동되는 경우입니다. 전혀 ‘읍(泣)’이 없이 단지 ‘참(斬)’만 있을 뿐인데도 ‘읍참마속’ 운운하는 경우가 많다는 얘깁니다. 단지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 사람을 내치는 경우에조차 웬 ‘읍참마속’ 운운하는 것일까요. ‘백의종군’이란 말을 쓰는 것 자체에서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입니다만, ‘읍참마속’이란 말을 하는 사람은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실책을 범한’ 마속에 상대방을 비유하는 것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제갈공명에 견주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제갈량의 ‘읍참마속’은 법(法)과 원칙을 지키기 위한 서슬 퍼런 도리(道理)의 칼날 위에서 벌어진 인간적인 오열(嗚咽)이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사정(私情)을 가까스로 딛고 공의(公義)의 메커니즘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몸부림이었습니다. 마속은 ‘재기과인 언과기실’했을지언정, 권력자의 총애를 받는다는 점을 기화로 이권이나 청탁이나 비리에 개입하는 따위의 행동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기록도 없을뿐더러 마속이 제갈량에게 용서를 빌었을 때 ‘십만 대중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는 ‘삼국지’ 배송지(裴松之) 주(注)의 인용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제갈량은 마속의 계속적인 이권개입에 모르는 척 눈을 감다가 결정적인 실책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나자 서둘러 상황을 덮기 위해 그를 황급히 불러와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배송지 주에서 인용한 ‘양양기(襄陽記)’에는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마속이 죽은 뒤 장완(蔣琬)이 한중으로 와 제갈량에게 ‘마속을 죽일 필요까지 있었느냐’고 항변했습니다. 그러자 제갈량은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손무(孫武·손자병법의 저자)가 천하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법을 씀이 밝았기 때문이다. 사해(四海)가 분열돼 바야흐로 전쟁이 시작됐는데, 만약 다시 법을 덮어버린다면 무엇으로써 적을 토벌할 수 있단 말인가.(손무소이능제승어천하자 용법명야 금사해분열 병교방시 약부폐법 하용토적야·孫武所以能制勝於天下者 用法明也 今四海分裂 兵交方始 若複廢法 何用討賊邪)” 이것은 서둘러 도마뱀 꼬리를 잘라버리려는 사람의 언어가 아닙니다.
셋째, 이것이 아주 중요한데요. ‘읍참마속’은 결코 ‘읍참마속’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법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잠시 집행자의 역할을 한 직후, 제갈량은 자신의 책임을 누구보다도 엄중히 물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일회성 ‘쇼’가 아니었습니다. 정사 ‘삼국지’ 제갈량전에 실린 상소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과오는 모두 신(臣)이 아랫사람에게 임무를 잘못 맡긴 데에 있습니다. 신은 사람을 알아보는 명철함이 없으며, 일을 맡음에 어두움이 많았습니다. 청컨대 저 스스로 직위를 세 등급 강등시켜 그 책임을 지게 해 주십시오.(구개재신수임무방 신명부지인 휼사다암 청자폄삼등 이독궐구·咎皆在臣授任無方 臣明不知人 恤事多闇 請自貶三等 以督厥咎)”
마속을 읍(泣)하면서 참(斬)한 사람은 돌아서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또는 오히려 그 ‘참’으로 인해서 ‘나는 살았다’고 안도하며 몰래 웃지 않았습니다. 그를 내 손으로 참했다고 해서 스스로를 정당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강등시켰으며, 징계했으며, 진정으로 참회했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반드시 그것을 원한 것은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읍참마속’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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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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