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사라진 세계…누구라도 ‘괴물’이 될 수 있다[전문가의 세계 - 박승일의 영화X기술]

기자 2023. 11. 16.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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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나는 전설이다
바이러스에 파멸한 인류, 유일한 생존자 네빌…영화는 ‘괴물’로 치부된 감염자에 ‘이성’ 부여해 인간중심적 판단 근거 잃게 해
생명·이성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 말하며…묻는다, 인간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까
영화 <나는 전설이다>의 한 장면. 정체불명 바이러스로 대부분 인간이 죽은 미국 뉴욕에서 주인공 네빌은 반려견 샘과 함께 외로이 살아간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지구에서 인간이 모두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인간 없는 세상>의 저자 앨런 와이즈먼은 우회 전략을 쓴다. 기후위기가 인류의 종말을 초래한다고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기보다는(이 방법은 안 통한다), 차라리 지구라는 행성적 차원에서 볼 때 인류의 종말 따위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님을 마치 해탈한 듯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사라진 바로 그날부터 자연에는 말 그대로 대청소와 같은 변화가 시작된다. 인간이 이룩한 문명은 그것이 아무리 위대한 것이든 자연과 시간의 연합 앞에서 무력하다. 도로는 갈라지고 철은 녹슬고 건물은 무너진다. 모든 견고한 것들이 침식되고 풍화되어 결국 바스러져 사라진다. 자연은 그렇게 인간의 흔적을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지워나간다. 그리고 인간이 사라진 그 자리를 수많은 새들과 무성한 식물, 그리고 다시 돌아온 각종 동물들로 채워간다.

영화 <나는 전설이다>는 인간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난 뒤의 상황을 배경으로 삼는다. 아니다, 정정하자. 인간은 사라진 게 아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흡사 ‘괴물’과도 같은 비인간 존재가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영화는 오직 한 명의 인간만이 살아남은 세계의 모습을 그려내면서, 역설적으로 본래 이 세계란 인간과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 존재해 왔음을, 그리하여 인간이 있건 없건 여전히(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마치 당연한 진실처럼 우리 앞에 툭하고 던져 놓는다. 인간이 없는 세계를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까? 영화를 통해 질문은 새롭게 도래한다.

사건의 발단, 구원과 파멸의 동시성

역시나 사건은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부터 비롯된다. 인류는 유전자 조작 기술을 이용해 기존의 홍역 바이러스를 암 치료 백신으로 개조하는 데 성공한다. 1만900명 임상 실험에 1만900명 완치라는 경이로운 기록! 기쁨과 흥분이 넘쳐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영화는 갑자기 3년 후라는 자막과 함께 아무도 살지 않아 폐허가 되어 버린 거대 도시 뉴욕의 모습을 비춘다. 앞서 말한 인간 없는 세계의 모습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관객은 어리둥절하다. 바로 그때, 적막한 폐허 사이를 빨간색 스포츠카 한 대가 거침없이 질주한다. 주인공 로버트 네빌(윌 스미스)과 그의 반려견 샘이 스포츠카를 타고 사슴 무리를 쫓는 중이다. 하지만 인간이 사라진 세계는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다. 그곳은 무성한 수풀의 세계고 먹이를 찾아 몰려온 사슴의 세계이며, 동시에 그 사슴을 따라온 사자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세계이기에, 특히 인간의 세계는 더더욱 아니기에, 네빌은 사슴을 사자에게 양보한다.

구원과 파멸은 때론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특히 그것이 기술에 의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3년 전으로 되돌아가 보자. 암 치료를 위해 투여한 바이러스 백신이 임상 시험자 내부에서 갑작스러운 변이를 일으켰다. 임상 시험자가 광견병 유사한 증세를 보이더니 곧이어 사람을 물어뜯기 시작했고 이내 뉴욕은 아비규환으로 변해갔다. 급기야 이 바이러스가 공기 감염이 가능한 형태로 자체 진화하면서 감염은 단지 뉴욕을 봉쇄하는 정도로는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바이러스는 공항을 거쳐 전 세계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고, 여기에 감염된 모든 인간을 그저 피에 굶주린 비인간 존재, 즉 일종의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인류는 어떤 대비도 하지 못한 채, 구원의 메시지와 함께 파멸을 맞게 된다. 오직 네빌과 샘만이 그에 대한 면역을 가진 이유로 이 재난에서 비껴갈 수 있었다.

인간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기

하지만 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또 다른 재난이다. 네빌은 아내와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자기도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밤새 뒤척인다. 사실 그는 육군 화생방 장교이면서 타임지 표지에 실릴 만큼 뛰어난 과학자이기도 하다. 그런 능력을 바탕으로 그는 자기 집 지하에 각종 연구 시설을 설치하고 지난 3년 동안 계속해서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 감염된 쥐를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진행해 왔다. 백신을 만들어 인류를 구하는 것만이 그의 죄책감과 두려움을 없앨 유일한 방도였다. 지금까지는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어느 날 한 쥐가 다른 쥐와는 달리 공격성이 많이 줄어든 것을 보고 그는 일말의 희망을 발견한다. 그러나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쥐가 아니라 진짜 감염자의 신체, 즉 ‘괴물’의 신체가 필요했다.

네빌과 샘은 다시 사슴을 추격한다. 아마도 부족한 식량 때문일 터이다. 사슴을 쫓던 중 감염자 무리의 소굴을 찾아낸 네빌은 이때다 싶었는지 감염자를 포획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함정을 설치하고 자기 피로 미끼를 만들어 드디어 감염자를 낚아채는 데 성공한다. 그 순간 남성으로 보이는 다른 감염자가 햇빛에 피부가 타들어 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네빌을 향해 실로 거대한 분노를 내지른다. 마치 자신의 연인이라도 납치된 것처럼 말이다.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이성을 포함한 모든 인간적인 특징이 사라지고 오직 피를 향한 갈망만 남는 게 아니었나? 네빌은 이상함을 느낀다.

아,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한다. 네빌은 반려견 샘을 비롯해 다양한 사물과 대화를 나눈다. 그는 샘과 온종일 대화하는 것도 모자라 상점 앞에 서 있는 마네킹 마지, 프레드와도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그가 지은 이름이다). 여자 마네킹에게 이성적 관심을 표현하기도 한다. 혼자 살다 보니 심심해서 그러는 것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혼자라는 것은 분명 심연과도 같은 외로움일 테니까. 하지만 그게 다일까? 단지 대화 상대를 그리워하는 것뿐일까? 일단은 질문부터 확인하자. 질문이 사유를 촉발하는 법이다.

누가 ‘괴물’인가?

네빌은 포획한 여성 감염자에게 백신을 투여하지만 여전한 실패 앞에서 실망하고 만다. 경과를 더 두고 보기로 하고 다시 도시를 탐색하던 중에, 네빌은 한 건물 앞에 마네킹 프레드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한다. 아니, 그런데 저 마네킹은 상점 앞에 있던 바로 그 마네킹이 아니던가! 네빌은 아연실색한다. 이 세계에 자기 말고 다른 누가 있단 말인가? 말문이 막힌다. 네빌은 혼란스러움을 진정시키면서 주위를 둘러보지만, 그 순간 발을 낚아채는 올무에 걸리고 만다. 도대체 누구의 짓인가? 함정을 설치할 정도의 이성을 가진 존재라면, 단연코 인간밖에 없지 않은가?

짐작할 수 있듯이, 이 함정을 설치한 존재는 앞서 ‘괴물’이라고 칭했던 감염자들이다. 영화 내내 그들은 이성과 사회성을 상실한 채 그저 피에 대한 욕구만을 가진, 마치 ‘괴물’과도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좀비를 닮은 모습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 영화는 돌연 그들이 동료(또는 연인)의 납치에 대해 분노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고안한 함정의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모방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이들이 나름의 사회성과 이성을 가진 존재라니! 네빌만큼이나 관객 또한 놀랄 수밖에 없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인간과 비인간을 선명하게 나누어 왔던 바로 그 이성이라는 특징을 의문에 붙인다. 이성이 더 이상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근본적인 차이가 아니게 될 때, 그 이성의 유무를 전제로 내렸던 모든 인간 중심적인 판단은 근거를 잃게 된다.

아마도 네빌은 이렇게 판단했을 것이다. 감염자 무리는 인류를 위협하는 적이자 악이며, 더욱이 이성도 의식도 없는 존재이기에 말 그대로 ‘괴물’이나 다름없다고. 그렇기에 그들을 납치하고 죽이는 것은 죄책감이 필요 없는 선이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의라고 말이다. 이 논리는 묘하게도 라틴 아메리카의 원주민을 학살했던 스페인 식민주의자의 논리와도 닮아 있다. 상대가 괴물(악)이라면, 이성(영혼)이 없다면, 또는 그렇게 규정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죽여도 된다는 논리. 이 논리는 인간과 동물, 인간과 인간, 인간과 비인간 사이를 가로지르면서 역사상 수많은 배제와 죽음을 만들어 왔다. 심지어 지금도 지구 한편에서는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영화는 이러한 논리가 사실상 ‘근거 없음’을 근거로 삼고 있으며 우리 또한 그 논리에 스며들어 있음을, 그리하여 우리가 곧 네빌과 다르지 않음을, 완곡하지만 분명하게 말한다.

놀라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는 한발 더 나아간다. 대체 누가 ‘괴물’이냐고 묻는 것이다. 네빌은 이전에 납치한 감염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연구소로 내려간다. 여성 감염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누워있다. 그리고 살짝 비춰지는 연구소의 벽, 거기에는 적어도 수십 명의 피실험자 사진이 빼곡히 붙어 있다. 모두가 감염자들이고 생체 실험을 위해 납치된 자들이다. 어쩌면 감염자들에게는 네빌이야말로 어느 순간 불쑥 찾아와 자신의 동료와 연인을 납치해 가는 ‘괴물’이 아니었을까? 괴물이라는 표현에 작은따옴표를 붙인 이유가 여기 있는데, 괴물이란 어딘가에 숨어 있는 악하고 흉측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절대화하면서 타자의 삶을 부정하는 그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전설이다. 그런데 어떤 전설인가?

결국 감염자들은 네빌의 집을 습격한다. 한바탕 접전 끝에 감염자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와 네빌이 강화 유리를 사이에 두고 완강히 대치한다. 여기서 영화는 극장판과 감독판이라는 두 가지 결말을 준비한다. 먼저 극장판은 네빌이 또 다른 생존자 안나에게 치료가 가능한 혈액 샘플을 건네준 뒤 수류탄을 터트려서 감염자들과 함께 죽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안나는 이 혈액을 생존자 캠프에 건네주고, 그리하여 네빌은 치료제를 만든 ‘전설’이 된다. 악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우다가 마침내 인류를 구원하고 산화하는 메시아의 모습, 감동적일지는 모르겠지만 퇴보한 결말이다. 그렇게 도래할 세계는 인간 중심주의라는 이전의 세계와 꼭 같기 때문이다.

감독판은 사뭇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 네빌은 감염자들이 납치된 여성 감염자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공격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를 순순히 넘겨준다. 대장 감염자와 그녀는 서로를 바라보고 보듬고 어루만진다. 서로 사랑했던 것이리라. 네빌은 비로소 깨닫는다. 오히려 자신이야말로 ‘전설’ 속 괴물이었음을. 감염자 무리는 공격을 멈춘 뒤 되돌아가고, 네빌과 안나는 다음날 다른 생존자를 찾아 길을 떠난다. 인간과 비인간은 그렇게 각자의 길을 향해 걸어간다. 여기에는 감동 대신 어떤 깨달음이 있다. 인간이 더는 자신의 특별함을 주장할 수 없는 세계, 또 그럼으로써 인간과 비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세계가 이렇게 하나의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모든 것은 존재한다는 점에서 동등하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조금은 헷갈릴 법도 하다. 인류를 구하기 위한 네빌의 행위가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감염자는 인류 종말을 초래한 괴물이 아니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감염과 종말이라는 영화상의 극단적인 설정을 걷어 내고 나면 핵심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쩌면 이 영화는 인간이 주인공이었던 세계가 사라졌을 때, 또는 반대로 세계 속에서 인간이 더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게 되었을 때, 그때 모든 존재는 단지 존재한다는 점에서 동등할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앞에서 나는 네빌이 마네킹과 대화하는 이유가 단순한 그리움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했는데, 이는 그 세계가 네빌의 세계인 것만큼이나 반려견 샘의 세계이고 마네킹 프레드의 세계이며 비인간 존재인 감염자들의 세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생명이 있든 없든, 이성이 있든 없든, 모든 존재는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세계의 일부를 이루어 간다. 바꿔 말하자면, 세계는 인간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이 놀라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를 어떻게 현재의 세계 감각으로 가져올 것인가?

앞서 말했듯이 <인간 없는 세상>과 <나는 전설이다>는 인간 없는 세계라는 가정을 공유한다. 극심한 기후 위기와 무분별한 기술 개발 탓이고 무엇보다 인간 중심주의 때문이다. 이런 극단적인 가정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너무나 인간적이기에 인류의 종말을 가정하지 않으면 도무지 존재의 동등성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더는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없는 세계라는 가정하에서만 그나마 인간 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이 책과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그런 가정을 미리 앞당겨 사유하게 함으로써 현재의 인간 중심주의를 조금이나마 반성하게 만드는 일종의 죽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 없는 세계를 사유하는 한에서만 인간 없는 세계를 유예시킬 수 있다.

박승일



캣츠랩(CATS Lab) 소장이자 기술문화연구자. 공학과 사회과학을 전공했고 아울러 인문학도 공부하고 있다.

정직한 공부가 더 나은 세계를 만든다고 믿는다. <기계, 권력, 사회>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박승일 캣츠랩(CATS Lab) 소장이자 기술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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