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일의 보이스 오버] 탈 좋은 배우
배우의 얼굴에 다채로운 감정의 주름이 공존할 때, 좋은 탈이라 상찬한다. 슬픈 눈빛 사이로 오만하게 솟은 콧대 아래 못마땅한 입술. 잔인한 눈매에 상반되는 짧고 동그란 하관이 빚은 천진함. 무표정을 감당할 수 없는 배우 팔자의 얼굴을 영화판에서 탈이라 부른다.
영화의 장기 중 하나가 클로즈업이다 보니 좋은 탈을 가진 배우는 영화에서 더욱 환영받는다. 화면을 가득 채운 얼굴은 포토그래피를 넘은 장엄한 토포그래피다. 탈이 좋은 배우는 경력을 쌓을수록 자신의 탈을 능란하게 활용한다.
영화 <1900년> 촬영 현장에서 동시녹음기사는 로버트 드니로의 대사를 수음하지 못해 쩔쩔맸다. 드니로는 특정 장면에서 입만 벙긋거렸다. 녹음기사는 할리우드에서 온 스타배우에게 조금 크게 소리를 내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어 속만 끓이고 있었다. 어느 날, 드니로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녹음기사에게 다가왔다. 얼굴에 주름이 많은 드니로는 클로즈업 장면을 찍을 때는 되도록 주름이 덜 잡히도록 입을 작게 벌린다며 양해를 구했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같은 미남배우들이 그토록 가지고 싶은 드니로의 탈은 그렇게 조각되어 온 것이다.
한국에도 좋은 탈을 가진 남자배우가 적지 않다. 연극무대에서 숙련된 신체 연기에 탈까지 좋은 배우들은 영화와 방송으로 대거 흡수되었다. 연극배우들의 유입이 없었다면 한국영화와 드라마 환경은 푸석했을 것이다. 신구와 오지명이 앞줄이나 육체미가 살짝 부족하여 주인공을 맡기에는 아쉬운 데가 있다. 이 지점에서 모든 것을 충족하는 배우가 유인촌이었다. 그러나 연극무대에 대한 열정과 장수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연기한 김회장댁 차남 이미지에 박제돼 영화에서 활약이 저조했다.
유인촌 연배의 배우 중 그만큼 잘 조형된 탈에 연기력 좋고, 결정적으로 관능미가 있는 남자배우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최인호 원작 드라마 <불새>에서 보여준 유인촌의 캐릭터 소화력은 이후 몇 번이나 리메이크되었지만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임권택 감독의 <연산일기>와 <김의 전쟁>에서 재차 입증된 탈 좋은 영화배우로서의 유인촌의 매력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햄릿에 꽂힌 유인촌은 공연의 뜨거운 열기와 함께 연소되는 연극을 즐겼다. 잊히고 싶다는 그의 바람대로 영화나 드라마에 애착이 적었다.
배우 유인촌은 이명박 전 대통령을 모델로 한 드라마 <야망의 세월>을 계기로 공직에 입문했다. 유인촌의 야망이 연극무대에서 정치무대로 옮겨지면서 그의 연기술은 현실정치에서 매끄럽게 작동하기 시작한다.
청문회장에서 안경다리를 입에 물고 고심하는 햄릿의 이미지는 임기 말기에 격노하는 오델로가 돼 추락한다. 그사이 국정원은 집권세력에 삐딱하다는 이유로 9273명의 예술인(단체)을 블랙리스트로 묶어 감시 관리했다. 이들 중 영화인이 2468명이나 돼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사찰을 통해, 국가 지원 사업에서 배제시키고, 표적 세무조사로 제작사를 절단내는 한편, 영향력 있는 특정 연예인을 마약중독자로 중상한 뉴스를 살포할 기획까지 서슴지 않았다.
당시 문체부 장관이었던 유인촌은 모르는 일이라고 부인한다. 무지했거나 무능했다는 고백인가. 배우 유인촌이 정의하는 예술가는 ‘과거를 되새기고 현실의 밑바닥까지 성찰하며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장관이 된 유인촌의 예술가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창작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바람과 달리 유인촌은 연기력 좋은 장관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유인촌 장관이 5년 안에 에미상과 아카데미상의 주요 상을 받아올 킬러 콘텐츠 5편을 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한국영화 미래는 미국인들이 주는 상을 받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인 것인가?
서정일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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