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세상] 환경부는 ‘일회용품 구원자?’
나는 병이 있다. 친구와 만나든 회의를 하든 허구한 날 늦는다. 새해 아침마다 절대 안 늦겠다고 결심하고서 새해 첫날부터 늦는다. 이젠 ‘지각도 병인 양하노라’ 읊조리며 ‘지각 불치병’을 인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딱 한 번 제 시간에 가다 자전거에서 엎어져 늦었는데도 다들 믿지 않고 또 늦었군 하는 표정이었다. 이번 환경부의 일회용품 관련 발표를 들으며 지각병이 떠올랐다. 자꾸 약속을 어기면 개인도 신용을 잃기 마련인데 환경부는 이제 잃을 신용도 없겠다 싶어서다.
환경부는 매장 내 일회용 컵과 플라스틱 빨대 사용, 물티슈 무상 제공, 장례식장 일회용기 사용을 금지하고 일회용 컵 보증금제를 시행할 계획이었다. 특히 일회용 컵 보증금제는 대통령 당선 공약에도 자랑스레 나와 있다. 그러나 물티슈와 장례식장 규제를 포기하고, 일회용 컵 보증금제의 전국 시행을 막고, 단속을 유예하는 등 줄줄이 일회용품 관련 정책을 지르밟았다. 급기야 일회용 컵 보증금제에서 발 뺀다고 선언하고, 일회용 종이컵과 플라스틱 빨대 사용 금지를 철회하고, 편의점 비닐봉지 사용 단속을 유예했다. 소상공인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며 “종이컵에 담긴 떡볶이를 먹는 아이들을 내쫓을 수 없어서” “손님에게 어묵 국물을 줄 수 없어서”라고 했다. 보도자료는 네로와 파트라슈가 굶어 죽는 <플란다스의 개>에 필적하는 ‘갬성팔이’로 충만했다.
그런데 종이 빨대 업체는 소상공인이 아닌가? 종이 빨대 업체들은 “지금 누구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며 당장 다음달 대금을 갚지 못할 상황에 내몰렸고 이에 직원들에게 퇴사를 권하고 있다. 얼마 전 환경부와 미팅을 했는데 그때만 해도 일회용품 사용 규제를 한다고 했단다. 한두 번이 아니다. 환경부가 일회용 컵 보증금제 전국 시행을 철회하자마자 다회용 컵 대여 업체인 ‘트래시버스터즈’는 약 100곳의 카페에서 계약을 파기당했다. 저소득층 일자리를 만드는 전주의 한 지역자활업체는 일회용 컵을 수거해 재활용하기 위해 트럭과 설비에 1억원 이상 투자했으나 결국 직원을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 업체는 정부 산하기관과 계약해 일회용 컵을 수거해 다시 컵으로 재활용하는 시범사업 중이었다. 일회용 컵 보증금제를 시행 중인 제주도는 스타벅스와 파리바케트 전 지점이 다회용 컵으로 전환하는 등 성과가 나기 시작했으나, 환경부가 태도를 바꾸자 카페들이 보증금제와 다회용 컵 서비스에서 이탈하고 있다.
이쯤 되면 환경부는 자원순환을 망치러 온 일회용품 구원자 아닌가. 소상공인이 걱정되면 매장 평수나 연 매출 8000만원 이하 간이 과세자 등 기준을 세워 한시적 예외를 인정하면 된다. 이제야 매장 내 다회용 컵이 정착되고 시민들도 적응 중이었는데 물거품이 되었다. 그저 예정대로 11월24일 단속과 과태료 부과를 시행하거나 가만있어도 됐을 것이다.
정책은 당국이 시민과 기업에 보내는 신호다. 재활용등급제를 시행하고 6개월 만에 90% 이상의 음료병이 투명 페트병으로 변경된 것처럼, 정책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지 방향을 정해준다. 2024년 플라스틱 국제협약이 시행될 예정이고 다른 나라들은 플라스틱 규제를 강화하는데 우리만 거꾸로 간다. 환경부는 일회용품을 대체할 대안의 싹마저 싹 뽑아버렸다. 정녕 이번 정책은 아니 시행되었어야 좋았을 것이다.
고금숙 플라스틱프리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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