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친구 한명이면 인생은 살만해

한겨레 2023. 11. 16.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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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경의 이방인 초라함의 상대성][안희경의 이방인, 초라함의 상대성]

9 _노라의 ‘미나리’

노라의 아들이 한국학교에 다닌 지 1년쯤 됐을 때다. 저녁을 먹다 어깨춤을 추며 말했다. ‘나는 코리언, 엄마도 코리언, 누나도 코리언! 그리고 아빠도 코.리.언!’ 남편은 백인이다. 그의 증조부모가 유럽에서 이민 왔기에 눈동자를 굴리며 읊조렸다 ‘나는 코리언 아닌데’ 노라는 웃음을 터트렸고, 아들은 들이쉰 숨을 내쉬지 못했다. “와앗?(What? 뭐라고?)” 그러니까 6살 아들에게는 인종, 민족, 국가의 개념이 없다. 사람은 다른 언어를 쓸 수 있고 생김도 원래 다 다르다고 이해했다.

가난하고 학력 낮은 젊은 부모가 이민이라는 도박을 감행했고, 아이들은 그런 부모와 함께 또래와는 다른 세상에서 일상을 보냈다는 점에서 노라의 삶은 영화 ‘미나리’ 이야기와 닮았다.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판씨네마 제공

엄마 토끼가 죽었다. 새끼 토끼들에게 주려고 뜯어온 풀을 바닥에 놓기 무섭게 새끼들을 밀쳐 내며 먹어치우던 엄마 토끼였다. 다 삼키기도 전에 널브러졌다. 공원을 다시 찾고서야 알았다. 잔디에 비료를 쳤다는 경고문이 붙어있었다. 새끼가 독을 먹지 못하도록 어미가 막은 것이다.

노라가 어릴 적 아빠에게 들은 이야기다. 시카고에 정착했을 때였는데 아빠는 ‘동물도 그런데, 나는 사람이니까 자식을 잘 키워야지'라고 끝맺었다. 노라의 아빠와 엄마는 밤 11시 출근해서 아침 7시 퇴근하는 공장노동자였다. 둘은 우범지역에서 살림을 시작했지만, 노라가 기억하는 유년의 집은 교외에 있는 마당 딸린 이층집이다. 잔디밭에는 닭과 병아리가 종종거렸고 토끼가 뛰어다녔다.

내가 노라를 처음 본 때는 2021년 봄이다. 한국학교에 5살 8살 아이를 데려왔는데, 그즈음부터 이민 2세대 부모 숫자가 많아졌고 노라도 그중 한명이었다. 눈이 크고 미소가 환했으며 늘 머리를 바짝 묶어 둥그런 이마를 드러냈다. 노라를 보면 흰죽 위에 말갛게 드리워진 밥물이 생각났는데,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갑옷 하나쯤 걸치련만 노라는 맨몸으로 상대를 마주하는 것 같았다. 들판의 풀꽃 같았다. 그런 노라라서 의사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한국말로 ‘나 제주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부모의 고향이 제주이고, 지금 엄마가 제주에 살고 있어 자기도 집 같다고 했다.

노라의 부모인 영철과 희순은 고향 친구였다. 희순의 아버지는 4·3 항쟁에서 목숨을 잃었고, 영철의 아버지는 정신을 잃었다. 수십마리 말을 키우고 귤 농사를 짓던 영철의 집은 순식간에 몰락했다. 영철은 시집간 희순이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희순은 미군과 결혼해 시카고에 사는 언니로부터 이민초청장을 받았다. 형제자매 초청이 열려있던 1970년대다. 희순은 어머니에게 딸을 맡기고 영철과 미국행 배에 올랐다.(영철은 노라에게 ‘아빠는 단돈 2달러와 닭 한마리 안고 미국에 왔어’라고 말하곤 했는데, 크면서 몇번을 확인한 노라는 정말로 닭을 안고 왔다고 내게 전했다. 우리는 배를 타셨겠다고 결론지었다.)

1981년 노라가 태어나고 이태 뒤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 사이에 희순은 제주에 두고 온 딸을 데려왔다. 갓난아이는 희순이 돌보고 노라는 큰딸이 돌봤다. 열세살 소녀가 두살 반 아이를 키웠다. 노라가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희순은 다시 공장에 나갔다. 아이들은 저들끼리 자라났다. 부모가 오기 전에 등교했고, 부모 취침시간에 하교했다.

유치원 시절, 노라는 파란 눈에 금발 머리를 갖고 싶었다. 아빠를 그린 도화지에는 파란 눈을 부릅뜬 백인 남자가 웃고 있었다. 노라는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았다. 부모님이 살아남으려면 미국사람이 돼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한국말도 가르치지 않았다. 정작 부모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고, 친구도 사귀지 못했다. 노라는 다른 가족이 사는 모습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1학년생 노라는 학교에 내는 건강관련 서류를 다른 아이의 것을 베껴 제출했다. 부모님 서명까지 노라가 했고 그 뒤로부터는 스스로 학부모가 되었다. 지금은 한밤에 노동해야 했던 부모님을 애처로운 마음으로 회상한다. 할 수 있는 일이 그 일이었고, 의료보험에 주택모기지를 내고 차를 살 수 있는 70~80년대 미국의 제조업 노동자가 된 것에 두분이 감사하며 성심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노라는 공부하기를 좋아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보낸다고 어울리기를 꺼린다는 뜻은 아니다. 친구를 사귀고 싶지만 다가가지 못할 뿐이다. 특히 고교 시절엔 학교가 싫을 지경이었다. 다들 무리 지어 어울린 데다 이민자 아이들도 인도, 중국 등으로 갈라져 노라에겐 다가설 틈이 보이지 않았다. 집에 와야 친구가 있었다. 같은 골목에 사는 여자아이로 중국계 엄마와 독일계 아빠를 둔 친구였다. 10대의 노라는 그때 중요한 인생 수업을 받았다. ‘좋은 친구 한명이면,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다.’

노라는 영화 ‘미나리’를 자신의 이야기라고 꼽는다. 가난하고 학력 낮은 젊은 부모가 이민이라는 도박을 감행했고, 그 부모와 함께 또래와는 다른 세상에서 일상을 보내는 아이들의 소소한 기쁨이 담긴 이야기다. 노라는 언니와 아빠 사이가 서먹했다는 점만 빼면 자신의 유년은 대체로 행복했다고 되새긴다. 다행히 언니는 친구가 많았다. 지금은 남편의 치과를 돌보며 지낸다.

노라가 성인이 되던 18살 때 부모님이 이혼했다. 곧 파산했다. 공장 자동화로 구조조정을 하면서 기계조작에 필요한 영어시험을 봤는데 두분은 탈락했다. 집안 살림이 뒤틀렸고 도박에 빠지게 됐다. 미국 공단지역에서 발생한 전형적인 현상이다. 공장이 문 닫고 도시가 몰락하고 마약성진통제 중독이 퍼진다. 도박도 궤를 같이한다. 계급의 몰락이 가져온 여파는 인종과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

노라는 공부만은 할 수 있기를 갈망했다. 사립인 시카고대 의대에 진학했다. 장학금을 받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빚도 졌다. 내로라하는 명문이지만 수억원에 달하는 학비가 빚으로 더해졌다. 교수당 학생 수가 적은 학교에서 배우고 싶었을 뿐이었다. 더는 잃을 것이 없기에 고민하지 않았다. 빚은 마흔 즈음 모두 갚았다. 20대의 노라는 걱정의 실체를 알고 있던 것 같다. 더 큰 걱정거리에 강타당할 때마다 하고 있던 걱정은 걱정이 아닌 거로 뭉개지는 경험을 반복해서인지 인생 맷집이 제법 세다.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정의한다.

노라의 아들이 한국학교에 다닌 지 1년쯤 됐을 때다. 저녁을 먹다 어깨춤을 추며 말했다. ‘나는 코리언, 엄마도 코리언, 누나도 코리언! 그리고 아빠도 코.리.언!’ 남편은 백인이다. 그의 증조부모가 유럽에서 이민 왔기에 눈동자를 굴리며 읊조렸다 ‘나는 코리언 아닌데’ 노라는 웃음을 터트렸고, 아들은 들이쉰 숨을 내쉬지 못했다. “와앗?(What? 뭐라고?)” 그러니까 6살 아들에게는 인종, 민족, 국가의 개념이 없다. 사람은 다른 언어를 쓸 수 있고 생김도 원래 다 다르다고 이해했다. 한국학교에 와도 인종이 섞인 아이들이 많으니 다들 코리언이라 생각했다. 그때부터 ‘인간은 인종을 차별하는 감각을 타고나지 않았다’는 노라의 믿음은 더 확고해졌다.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문화에 노출시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회의 통념에 물들기 전에 자신을 이루는 유산을 알아차리는 것 말이다. 노라는 한국인임을 싫어한 채로 자신의 유산을 인지해야 했다. 아무도 한국을 알지 못했고, 김치도 역겨워했다. 사회에서 거부당한다고 느낄 수밖에. 아이들이 한국계 미국인으로 당당하길 바란다.

그런데, 차별은 섬세하다. 길거리에서 조롱당했던 청소년 노라는 전문의 권위를 장착하고도 차별을 느낀다. 신입 남자 의사가 10년 경력인 노라를 하대했고, 소아환자의 부모들도 묘하게 하대하는 말투를 썼다. 아시안이라 어린 취급을 당하고 여성이라 애송이 취급을 받는데, 이중의 마이너리티는 의사라고 해서 벗겨지지 않았다.

지금 노라의 가족은 시카고에 산다. 두달 전 자리잡힌 캘리포니아 생활을 접고 남동생 곁으로 갔다. 버스운전사인 남동생은 중학생 때 접한 마약에 중독되기도 했는데, 아들을 낳고 삶을 바꿨다. 그런데 그 조카가 노라에게는 자폐스펙트럼으로 보였다. 4살인데 엄마라는 말조차 하지 못한다. 앞으로 녹록지 않을 그들의 삶이 눈에 보였다. 노라는 보살피는 마음을 하나라도 더한다면, 동생의 세상이 조금 더 살만해지지 않을까 하여 안락한 터전에서 몸을 일으켰다.

안희경 | 재미 저널리스트.

2002년 미국으로 이주, 문명사적 성찰과 대안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다. 인류 생존을 위한 10년 전략을 제시하는 대담집 ‘내일의 세계’, 세계 지성들과 코로나 19의 원인과 미래를 탐색하는 ‘오늘부터의 세계’, 리베카 솔닛 등 세계 여성 지성들과의 대담 ‘어크로스 페미니즘’, 문명의 현재와 이를 만들어온 개인의 마음 운용 실체까지 노엄 촘스키를 비롯한 세계 지성 29인과의 대담 3부작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문명, 그 길을 묻다’, ‘사피엔스의 마음’, 현대미술 작가들과의 대담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 ‘이해인의 말’, ‘최재천의 공부’, 에세이 ‘나의 질문’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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