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난·전쟁피로 겹친 美, 걸으면서 껌 씹을 수 있을까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부 장관은 지난달 12일(현지 시각) “미국은 걸으면서 껌도 씹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날 벨기에 브뤼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본부에서 열린 국방장관회의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미국은 우크라이나를 계속 지원하면서도 이스라엘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걸으면서 껌도 씹을 수 있다’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미국의 관용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회의 닷새전 팔레스타인 이슬람 무장세력 하마스의 이스라엘 침공으로 중동 전쟁까지 터졌다. 서방 맹주인 미국의 대(對)우크라이나 군사 원조가 중단될 수 있다는 우크라이나의 조바심이 고개를 들자, 오스틴 장관은 미국의 오랜 관용어로 자신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미국이 계속 걸으면서 껌도 씹을 수 있을지 회의론이 불거지고 있다. 수십년 간 미국 군사 외교의 초석 역할을 해왔던 미국 경제 패권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연방정부 부채가 33조달러(약 4경3000조원)를 넘어서는 등 재정난이 악화일로인 가운데, 미 정치권에서 ‘전쟁 피로감’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외교 수단이었던 美 경제력 한계”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9일 ‘미국 경제력이 중동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미국은 세계 1위 경제력과 세계 1위 군사력을 토대로 세계 패권 국가 역할을 수행해왔지만, 대표적인 외교 수단이었던 경제력의 약발이 먹혀들지 않고 있다고 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이달초 요르단과 이집트, 레바논 등을 방문했지만 “실망스러울 정도로 보여준 것이 거의 없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 가자지구와 맞닿은 이집트에는 가자지구 난민 수용을, 하마스를 지원하는 이란을 역내 안보 위협으로 보는 이집트와 요르단에게는 안보 협력을 각각 요청했지만 눈에 띄는 성과는 없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자발리아 난민촌 공습 이후 요르단은 이스라엘 대사를 초치해 항의했고, 블링컨 방문 이후에도 압둘라 2세 국왕, 아이만 사파디 요르단 외무장관 등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작전을 비난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세 나라 모두 경제적 파멸의 위기에 처해 있지만, 미국이 이들 정부를 도와줄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고 했다. 6월 기준 실업률이 22.3 %에 달하는 요르단은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고, 이집트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주력 산업인 관광업에 타격을 입은데다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과 해상 실크로드) 사업 차질과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최악의 외환위기를 맞고 있다. 미국이 빌려준 돈이면 미국이 탕감해주면 그만이지만, 미국의 중동 외교 방식이 국제통화기금(IMF·미국이 최대주주)을 통한 차관에서 조건없는 ‘원조’로 바뀌면서 미국이 나설 여지가 크게 줄었다. 이코노미스트는 “1991년 이집트의 걸프전 개입에 따른 선물로 (미국은) 이집트의 빚을 탕감해줄 수 있었는데 이제 탕감해줄 빚이 없다”고 했다.
◇'당근’ 못 주는데 ‘채찍’만 늘어
레바논도 미국이 작년 7월~올해 6월 1년간 9200만달러(약 1200억원)를 원조하는 등 공을 들인 나라지만, 공염불에 그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코로나 초기인 2020년 디폴트를 선언한 레바논의 경제는 파탄 상태다. 지난 8월 물가상승률이 230%에 달한다. 원조를 외교적 지렛대로 삼아 레바논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방안도 현재로선 기대하기 어렵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무장세력 헤즈볼라가 별도 정당을 통해 의회 의석수까지 확보하며 레바논 정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는 “레바논 정부는 너무 허약해서 흥정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했다.
‘당근’은 줄 수 없는 상황에서 대외 제재라는 ‘채찍’만 늘어 우군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올해 미국의 대외 제재 규모는 20년 전의 10배다.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요르단, 이집트에 이어 지난 5일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를 방문했지만 레제프 에르도안 대통령을 만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보도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블링컨 장관의 면담 요청을 거절한 것으로 전해졌다. 튀르키예는 러시아·이란과 함께 하마스의 가자지구 통치를 인정하는 국가로, 전쟁 이후 팔레스타인을 지지해왔다.
◇'4京' 헤매는 재정난 속 고개 든 전쟁피로 여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이후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 기조가 이어지는 가운데, 미 정치권이 전쟁 피로감을 호소하면서 대외 원조는 교착 상태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20일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패키지 군사 지원을 위한 1050억달러(약 142조원) 규모의 안보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했지만, 야당인 공화당이 주도하는 하원은 우크라이나 지원안은 제외한 채 이스라엘 단독 지원안만 통과시켰다. ‘이스라엘 단독 지원안’은 지난 7일 민주당이 다수인 상원에서 부결됐다. 앞서 미 텔레그래프는 지난달 “바이든은 공화당이 장악한 하원, 대중의 전쟁 지지 약화라는 이중적인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보도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재정난이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어 경제 패권에 기반한 미국의 외교적 영향력이 얼마나 이어질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의 연방정부 부채 규모는 지난 9월 사상 처음으로 33조달러를 넘어섰고, 이후 국채 금리(10년물 기준)는 4~5%를 넘나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당시 감세로 세입이 줄어든 상황에서 바이든 행정부 들어 보조금 지급을 크게 늘린 결과다. 무디스는 지난 10일 미국 국가신용등급을 최고 등급(Aaa)으로 유지하면서도 신용 전망(outlook)은 ‘안정적(stable)’에서 ‘부정적(negative)’으로 낮췄다. 사상 최대 재정적자를 기록한 미국이 높은 금리의 채권을 제대로 갚을 수 있을지 의문시된다는 이례적인 평가가 나온 것이다. 9월말에 마감된 2023 회계연도 기준 미국의 재정적자 규모는 1조 7000억 달러로 코로나 팬데믹 기간을 제외하고 역대 최대다.
◇'최악의 경제위기’ 中도 팍스 시니카 ‘흔들’
‘팍스 아메리카나(미국 주도의 세계질서)’가 흔들리는 틈을 타 세계 경제력 2위, 군사력 3위 중국은 발빠르게 움직여왔다. 시진핑 주석의 역점 사업인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통해 중동·유럽·아프리카 주요국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팍스 시니카(중국 주도의 세계질서)’를 부흥시키려 했다.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은 특히 중동에 많은 공을 들여왔다. 중국이 이슬람 수니파 종주국 사우디와 시아파 맹주 이란의 지난 3월 관계 정상화를 주도한 것도 중동권의 환심을 사기 위한 노력의 결과라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최악의 경제 위기가 발목을 잡고 있다. 국내총생산(GDP)의 25%를 차지하는 부동산 시장이 전대미문의 위기를 맞고 있고 지방 정부 부채 문제가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됐다. 코로나 리오프닝(경제 활동 재개)에도 경기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 위기를 겪고 있다. 이런 가운데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스리랑카·잠비아·우간다 등 일대일로 채무국들에게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면, 중국이 휘청거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국이 일대일로에 참가한 개발도상국들에게 10년간 빌려준 대출은 8000억달러(약 1080조원)에 달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12일 “중국의 국내 금융부담 증가와 지방정부 재정 붕괴에 따른 피해는 향후 몇 년간 (중국이) 해외에서 더욱 인색해질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했다.
◇1년 만에 만난 미중 정상 “최악은 피하자”
미국과 중국의 어려운 경제 상황과 흔들리는 외교적 패권이 15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미국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이 성사된 배경 가운데 하나라는 분석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 이날 “시진핑 주석은 중국 부동산 폭락과 과도한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국인 투자와 수출 시장 확대가 필요했다”며 “바이든 대통령도 너무 많은 안보 위기를 피하기 위해 (중국과의) 관계가 원만해지기를 기대한다. 특히 대만 위기를 피하려 한다”고 했다. 미중 정상의 만남은 지난해 11월 14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G20(20국) 정상회의를 계기로 만난 지 1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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