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좀 나오면 의대? 기형적 쏠림의 부메랑 [아침햇발]
[아침햇발][의대 정원 확대]
[아침햇발] 황보연 | 논설위원
또 한번의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끝났다. 올해 수능에선 유독 졸업생 응시자(n수생)가 많았다. 응시자 50만4천여명 가운데 재학생은 32만6천여명(약 65%)에 그친다. 엔수생 비중은 수능 도입 초기 혼선이 컸던 1996학년도 이후 28년 만에 최고 수준이다. 대학을 3~4군데씩 묶어 등급으로 구분하는 서열화가 더 공고해진데다, 지난 6월 윤석열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킬러 문항 배제’ 방침은 수능에 강세를 보여온 졸업생을 대거 불러 모았다.
그런데 좀 더 우려스러운 점은 ‘의대 쏠림’이 미친 영향이다. 올해 초 취재 과정에서 만난 대학생 ㄱ은 사립대 인문계열에 입학했다가 반수를 해서 한의대로 갈아탔다. 수능 점수가 오르면서 ‘의치한약수’로 진로를 바꾼 경우였다. 원래 그는 철학 전공에 흥미가 있다고 했다. 한의대가 적성에 맞느냐고 물었더니 ‘다니다 보면 적응하지 않겠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또 다른 대학생 ㄴ은 4수 끝에 의대 합격증을 받았다. 그는 3수 만에 한의대에 합격했을 때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대를 다니는 친구들이 한의대를 한 단계 낮은 등급으로 여기는 것을 보면서 한번 더 수능을 봤다고 했다. ‘의치한약수’ 내에서도 서열은 다시 촘촘히 매겨지고 있었다.
의대 쏠림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단 적성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다른 전공에 관심이 있더라도 성적이 좀 나온다 싶으면 의대를 권유받는다. 학원에서 성적이 상위권이면 의대 지망이 아니더라도 ‘의대반’에 편입되는 식이다. 의대 준비의 시작 연령은 점차 내려가고 의대 입시에 도전하는 연령은 올라가고 있다. ‘초등 의대반 모집’ 펼침막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의대 지원을 위해 5수, 6수를 불사하는 ‘수능 낭인’이 생겨나고 이공계 학과는 학생 중도탈락으로 애를 먹고 있다. 최근 3년간 전국 국립대 의대에 정시전형으로 입학한 1121명 가운데 엔수생은 911명(81.3%)에 달했다. 경쟁 심화로 재학생이 바로 들어가기 어려운 지경이 된 것이다.
의대 쏠림은 입시에 몇 년 더 투자하더라도 평생 고소득이 보장되는 의사면허로 보상받는다는 믿음에서 나온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를 보면, 한국 개원의 평균 소득(2021년 전문의 기준)은 일반 노동자 대비 6.8배나 높다. 회원국 가운데 격차가 가장 크게 벌어진다. 외환위기 이후 고용 안정성이 크게 떨어진 한국 사회에서 의사는 ‘안정된 직업’의 최고봉에 올라섰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인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된 것이다. 의사단체 반발로 의대 정원이 18년째 묶이면서 의사면허로 인한 지대추구 효과는 훨씬 커졌다. 사법시험이 폐지되고 변호사 수가 늘어난 뒤로, 의사와 변호사 간 소득 격차가 점차 벌어진 것도 이를 방증하는 대목이다.
2020년 문재인 정부가 의대 증원과 공공의대 설립을 추진하자, 대한의사협회 산하 의료정책연구소는 ‘당신의 생사를 판가름 지을 중요한 진단을 받아야 할 때 어떤 의사를 고르겠느냐’는 질문을 담은 홍보물을 제작해 큰 논란을 일으켰다. ‘매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학창 시절 공부에 매진한 의사’와 ‘성적은 한참 모자라지만 그래도 의사가 되고 싶어 추천제로 입학한 공공의대 의사’ 중에 선택하라는 식이었다. 의사들의 특권의식이 그대로 드러난 사례였다.
기형적 의대 쏠림의 부메랑은 환자와 국민이 맞고 있다. 인구 1천명당 의사 수는 오이시디 회원국 평균에도 못 미친다.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로 대변되는 필수·지역의료 공백은 심각한 지경이다. 필수의료에 해당하는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과)는 외면받고 수익성이 높은 ‘피안성’(피부과·안과·성형외과)으로 의사들이 몰린 결과다. 그렇다고 의사들의 탐욕에만 책임을 돌릴 일도 아니다. 애당초 국가가 의료 공공성을 염두에 두고 의사 인력을 배분한 것이 아니라 영리 추구가 기본인 시장에만 맡겨둔 탓이 아닌가.
의대 쏠림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 문제들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다. 노동시장 양극화와 학벌 사회, 수도권 집중에 따른 지방 소멸, 정부·정치권의 무능까지. 고차방정식을 풀어야 하지만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 중요하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의대 증원 방침을 공식화한 마당에, 선거용 시늉에만 그쳐선 안 된다. 의사단체와 양자 협상을 통해 이 문제를 풀려 해서는 진전을 보기 어렵다. 정부가 의료 공공성을 회복할 장기 계획을 제시한 뒤, 제대로 된 사회적 공론화에 부쳐야 한다.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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