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법이니까”
내가 그녀를 처음 본 순간에도
이미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였었지
하지만 그건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법이니까
난 멈출 수가 없었어
이미 내 영혼은 그녀의 곁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에(이상 독백)
가려진 커튼 틈 사이로 처음 그댈 보았지
순간 모든 것이 멈춘 듯했고 가슴엔 사랑이
꿈이라도 좋겠어 느낄 수만 있다면
우연처럼 그댈 마주치는 순간이 내겐 전부였지만
멈출 수가 없었어 그땐
돌아서야 하는 것도 알아
기다림에 익숙해진 내 모습 뒤엔 언제나 눈물이
까맣게 타버린 가슴엔 꽃이 피질 않겠지
굳게 닫혀 버린 내 가슴속엔 차가운 바람이
오늘 밤 내방엔 파티가 열렸지
(늪에 빠진 거야)
그대를 위해 준비한 꽃은 어느새 시들고
(늪에 빠진 거야)
술잔을 비우며 힘없이 웃었지
또다시 상상 속으로 그댈 초대하는 거야
(1994년, 작사·작곡 하광훈, 조관우 1집 ‘My First Story’)
늪은 늪이다. 잔잔한 호수도 아니고, 드넓은 바다도 아니다. 미지의 늪은 발길을 유혹한다. 땅인지 물인지 그 속살이 궁금하다. 한 걸음쯤은 괜찮겠지. 조심스럽게 한 발, 또다시 한 발. 처음엔 허벅지 정도였다. 갑자기 허리가 쑤욱 빠진다. 팔다리를 허우적거려 보지만 이미 늦었다. 몸부림칠수록 늪은 더 빨리 더 깊게 몸을 끌어당긴다. 누가 꺼내줄 수도 없다. 같은 운명이 될 테니까. 그게 늪이다.
그런 늪의 속성으로 인해 삶의 여정에서 스스로의 의지로 헤어 나오기 힘든 일이 생겼을 때 늪에 빠졌다고 한다. 가난의 늪, 도박의 늪, 마약의 늪, 사채의 늪, 유혹의 늪, 탐욕의 늪처럼 늪의 모든 비유는 부정적이고 도망치기 힘든 것들이다.
여기 그 늪에 빠진 노래가 있다.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선 다음 해인 1994년 조용히, 얼굴 없이, 그러나 충격적으로 가요계에 등장한 가수가 있었으니 그는 조관우라는, 한국 대중가요사에서 ‘문제적’이고 ‘특이한’ 가수였다.
그의 1집 앨범 표지를 기억하는 이가 많다. 긴 머리를 앞으로 내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가수의 사진이 재킷 전면을 채웠다.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이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일까, 아니면 보고 싶지 않으려는 것일까, 아니 차마 못 볼 걸 본 것일까.
그 데뷔 앨범 ‘My First Story’의 타이틀곡 ‘늪’ 이야기다. 이 곡은 한국 대중가요에서 가장 ‘불온한’ 가사를 가진 노래다.
얼굴도 모르는 가수의 첫 앨범 판매량은 놀라웠다. 130만 장(비공식)이나 팔리는 빅히트를 기록했다. 1980년 대마초 파동에서 해금된 조용필의 1집 ‘창밖의 여자’가 최초의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면서 그의 장기 집권이 이어지는 가운데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는 김건모, 변진섭, 신승훈, 이문세를 선두로 한 발라드와 나미, 민해경, 소방차, 박남정, 김완선 등의 댄스 성인가요가 양분하던 시대였다.
이 노래가 나온 1994년 KBS가요대상은 김건모의 ‘핑계’였다. 1992년 ‘난 알아요’로 데뷔한 힙합 3인조 서태지와 아이들의 3집 ‘교실이데아’가 나온 해이고 가요시장은 서서히 10대 소비로 돌아서고 있었다.
이런 시대에 어둡고 불건전한 메시지를 기묘한 창법으로 부른, 발라드도 아니고 댄스도 아닌, 매우 이질적인 노래 ‘늪’이 성인 대중의 마음을 잡아끈 것이다.
사람들은 이 노래를 ‘불륜 가요’라고 했다. 가사 첫 줄부터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라고 대놓고 말한다. 하지만 유부녀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고 스스로 면죄부를 준다. 그때까진 남아있던 심의를 통과하긴 했으나, 모 종교 방송은 자체적으로 금지곡으로 결정했다.
가려진 커튼 틈 사이로 살짝 비친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모든 것은 멈추었다. 정지된 그것은 차가운 이성이거나 세상이 정한 세속의 윤리였을까. 그날 이후 내 영혼은 그녀의 곁을 맴돌았다. 하지만 안다. 돌아서야 한다는 것을. 그녀를 느낄 수 있는 것은 꿈속뿐이다. 그녀를 위해 준비한 꽃이 시들어 버린 방에서 혼자 술잔을 비운다. 나만의 파티다. 상상 속으로 그녀를 초대한다.
이 노래를 좋아한 사람들은 열광했다기보다는 그냥 ‘빠졌다’. 누구 앞에서 부르기도 민망해 혼자 차 안에서 볼륨을 높이고 리피트를 멈출 수 없는 중독성 강한 노래였다. 누구를 추억하든, 무엇을 상상하든, 그게 현실이든 판타지이든, 대리만족이든 카타르시스든, 그건 듣는 이의 자유였다.
불륜이란 통념적 잣대를 들이대면 이 부적절한 사랑은 엄밀하게 불륜이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정신적 불륜이고 상상적 간음이다. 상대는 우연히 스친 게 전부일 뿐 만난 적도 없는 여인이며 그렇다고 다가설 수도 없는 여인이다. 그러나 그 지독한 연모의 정은 멈출 수가 없어 가슴만 까맣게 타버린다. 노랫말에 ‘늪’이란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노래 끝부분에 두 번이나 “늪에 빠진 거야”라는 백코러스가 나온다.
가사는 전반적으로 묘하게 에로틱하면서도 처절하고 절망적이다. 이 한 구절이 부재했더라면 이 노래는 그냥 B급의 통속적 자조로 끝났을 거다.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법이니까”라는 구절, 이 구절이 이 노래를 구원했고 사람들의 공감대를 건드렸다. 진정 순결한 사랑은 짝사랑이 아닐까. 때가 묻을 수 없는 사랑, 유효기간이 없는 사랑은 혼자만의 사랑이다. 두 사람이 손을 잡는 순간, 그 사랑은 떠날 준비를 시작한다.
조관우의 데뷔곡이자 대표곡이 된 이 노래는 수많은 후배 가수가 리메이크했다. 불륜을 미화하거나 아름다운 사랑으로 승화하려 한 의도는 아닐 거다. 가사는 불온했지만 노래는 그 위험을 넘어서 매우 아름다웠으니까.
이 노래가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건 결코 가사 때문이 아니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4옥타브까지 올라가는 전율적이고 매혹적인 가성 창법이었다. 소름 돋는, 하지만 무서우리만큼 아름다운 천상의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악기보다 뛰어날 수도 있는 것을 알게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극단 고음의 가성으로 부르는 노래는 조관우 이전에 없었다. 조용필이 1979년 1집 ‘단발머리’에서 부분적으로 쓰긴 했다. 팔세토(falsetto) 창법이라고 하는데 남자가 소프라노처럼 높은 음역대의 가성을 발성하는 사람을 카운터테너(countertenor)나 카스트라토(castrato)라고 부른다. 성대가 접촉하지 않고 떨어진 상태에서 울리는 소리다. 자칫 목이 망가지기 쉽다.
여전히 음악을 하며 연기자로도 활동 폭을 넓힌 조관우(58)는 국악의 피를 타고 태어났다. 아버지는 판소리 대가 조통달이고, 명창 박초월은 이모할머니다. 그는 자연스레 국악예술고에 진학해 가야금을 전공했지만 외국의 록밴드와 흑인음악에 빠지게 된다. 1970년대 디스코의 상징이었던 밴드 비지스의 가성 창법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극단 고음 가성은 2집에서 만개했고 이 앨범은 1집을 훨씬 뛰어넘은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데뷔 1년 만인 1995년에 낸 2집 ‘Memory 1995’는 전체 8곡 중 6곡이 여성 가수의 리메이크곡으로 채워졌는데 그 가수들보다 음역대가 높았다. 여기 실린 ‘꽃밭에서’, ‘님은 먼 곳에’, ‘슬픈 인연’, ‘당신은 모르실거야’는 지금도 오리지널 가수보다 사랑받는다.
비공식적 추산으로 320만 장(공식은 214만 장)이 팔려 대중가요 역사를 새로 썼다고 한다. 현재까지 320만 장을 넘어선 노래는 김건모, 신승훈, 방탄소년단뿐이다. 조관우 4집까지는 100만 장 이상이 나갔다.
조관우와 작업한 사람은 조용필의 ‘위대한 탄생’과 그룹 ‘다섯손가락’ 기타리스트였던 하광훈(59)이다. 80, 90년대 대중가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다. ‘늪’도 그가 작사·작곡했다. 변진섭, 김민우, 장혜리, 김범수 등을 발굴하고 ‘홀로 된다는 것’ ‘너에게로 또 다시’(변진섭) ‘약속’(김범수) 같은 메가 히트곡을 만들어 준 사람이다.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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