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군비 경쟁 아니라 축소한 적도 있다···남한은 ‘전술핵 도입’, 북한은 ‘공업 노동력 확보’로 이어져

김종목 기자 2023. 11. 16.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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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5월 1일 경기도 주한미군 세인트바바라사격장(현 육군 다락대훈련장)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왼쪽 사진)과 어네스트 존 미사일 시범 발사 장면. 출처: 국가기록원

이동원(서울대 역사학부 조교수)의 <정전협정 이후 남·북한의 군비 축소와 ‘평화’ 담론>은 1950년대 후반 남북한의 군비 축소(이하 군축)를 다룬다.

북한은 1956년 8만 명의 병력 축소를 공약했다. 남한은 1958년 9만 명을 줄였다. “남북 관계의 교착 상태”에도 군축이 이뤄진 것이다. “남북의 대외원조 상황, 미소의 ‘평화 공세’, 중국 인민지원군과 주한미군의 철군 및 감축, 외국군 주둔 비용 및 국방비 부담, 전후 재건 지원을 위한 군 병력의 예비군 전환” 같은 여러 현실 문제가 작용한 결과다.

소련은 1955년부터 평화공존 전환을 선언했다. 중국도 그해 ‘평화 5원칙’을 천명했다. “흐루쇼프의 ‘평화공존’과 국제관계의 긴장 완화에 대한 믿음”에서 북한은 이듬해 5월 31일 자로 성명을 내고 “8월 31일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력 중에 8만 명을 축소한다” “상기 무력 축소에 적응하여 군사 장비와 전투 기재를 축소하며 해당한 군사비를 평화 건설과 인민 생활 향상에 충당시킨다”고 했다.

통계를 보면 공약은 실천한 듯하다. 서동만은 1968년 <북한총람>을 근거로 “정전 당시 약 25만 2000 명이던 육군 병력은 1년 이내에 약 10만 명이 증강하여 1955년 초에 42만 명을 돌파하였는데 1956년 5월 정부성명을 통해 8만 명이 감축되어 34만 명 내외를 유지”했다고 봤다. 선종률은 <북한연표 1945~1961>을 근거로 “1953년 7월 당시 27만 5000 명이던 북한군 병력은 이후 꾸준히 증가하여 1955년에는 45만 명까지 증가하였다가, 1958년부터 1960년 말까지는 38만3000명 선을 유지”했다고 했다.이동원은 두 통계를 근거로 “1955년 당시 인민군 규모는 42만~45만 명 수준으로 추정할 수 있고, 이를 기준으로 할 때 8만 명 수준의 병력 감축은 기존 병력을 약 18~19% 감축하는 대규모 감군이었다”고 분석한다. “남한 인구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던 북한 경제 규모를 고려할 때 북한이 남한 대비 2/3 수준에 해당하는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은 남한 이상으로 경제력에 비해 과도한 군사력을 보유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도 했다.

북한 경제는 어려웠다. 북한 정부는 소련과 중국 원조에도 기댔다. 1956년 5월 21일 북한 외상 남일은 소련 대사 이바노프와 면담 때 “우리는 원조를 받지 않으면 헤쳐나갈 수가 없다”며 채무 면제와 추가 무상 원조를 요청했다. 다음 날 수상 김일성도 이바노프에게 “소련 지도자들과 회동할 때, 우리 인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다시 한번 무상원조를 제공해달라고 요청할 예정”이라고 했다. 무상 원조는 총액 5억 루블이었다.

이동원은 “북한 정부는 경제난과 인민의 생활고를 공론화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성명을 낸 그해 5월 31일 불가리아 대사 그리고로프는 이바노프와의 대담 자리에서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에서는 성과만 언급하고, 인민들의 어려운 형편을 두고는 아무것도 언급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병력 감축에 관한 성명 게재 3일 전인 5월 28일, 남일은 이바노프를 만나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에서 조선인민군 병력을 8만 명 감축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통보했다. 이동원은 감축 성명이 “소련의 ‘평화공존’에 대한 대응이자 북한 경제난에 대한 대응으로서 북한의 외교적 입장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라고 했다.

인민군 제대군인들은 노동력이 부족한 농촌과 탄광 등지에 투입됐다. 북한은 한국전쟁기 사상자 발생, 피난, 월남으로 인한 노동 인구의 대폭 감소 같은 상황에서 전후 복구 공업화를 시작했다. 도시로의 급격한 노동력 유입은 농촌 노동력의 붕괴를 가져왔다. 이동원은 “제대군인들에 대한 농촌 및 탄광 중심의 배치는 노동력의 공업 부문 이전에 따른 강제적 조치나 다름없었다”고 말한다. 이들은 “협동화와 사회주의를 향한 주민 개조의 전위대”로서 활동했다. 이동원은 이들 제대군인이 노동력이 부족한 현장에서 환영받았다고 했다.

북한이 군축을 결정한 1956년 남한에선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평화통일론’이 나왔다. “진보당이 평화통일론을 주장하면서 북진통일론 일색의 구도에 균열”이 나타난 것이다. 균열이 변화를 만든 건 아니다.

야당인 민주당의 조병옥도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사회주의적 경향을 띤 소위 평화공존론을 주장하는 용공정책”으로 규정했다. 대통령 이승만은 그해 6월 21일 “유화를 말하고 솔직하지 않은 또 다른 방법인 공존으로 지향하는 추세는 그 정체를 드러낸 것 같으므로 자유인민들은 공산주의자들이 그 목적을 변경하지 않고 다만 그 전술만을 변경하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그는 ‘북핵에 맞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 시급하다고도 했다.

이 ‘군사적 우위’는 미국에 달린 문제였다.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사회주의권의 ‘평화 공세’를 “‘분열, 유혹, 이중성’을 특징으로 하는 공산권의 위험한 전술로, ‘자유세계에 심각한 위협’”으로 여겼다. 아이젠하워는 1956년 3월 19일, 제3세계 원조를 위해 1956 회계연도보다 약 1.5 배 증가한 규모인 약 46억7000만 달러를 1957 회계연도 대외원조에 사용하도록 승인해줄 것을 의회에 요구했다.

의회는 우호적이지 않았다. 1950년대 중반 접어들면서 민주당과 공화당 양쪽에서 특히 군사원조에 대한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군사원조를 포함한 미국의 대외원조 규모도 줄었다. “국무부와 국방부의 최고위 관료 수준에서는 대한원조 감소에 따른 한국군 감축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다.

국방부 장관 윌슨은 1957년 4월 17일에 열린 NSC 제320차 회의에서 미국이 매년 제공하는 7억5000만 달러 군사 원조 규모에서 5000만~7000만 달러, 즉 5~10% 정도를 삭감하고, 한국군 수준도 단계적으로 낮춰야 한다고 했다.

‘한국군 감축 반대, 자유당 성명, 전세계에 호소하다’, 경향신문 1957년 8월24일자 1면 보도.

대외원조 감소 전에도 감축은 논의됐다. 1954년 체결된 한미합의의사록 부록 B의 3항이나 1955년 2월 25일 미국의 대한정책을 공식화한 NSC 5514는 예비 사단을 만들고, 현역 부대 규모는 줄이기로 했다.

미국은 주한미군의 ‘현대 무기(modern weapons)’ 도입을 감축 조건으로 내걸기도 했다. NSC 제 320차 회의에서 합참의장 레드포드는 “한국에 방어용 핵무기를 배치한다면 한국인들도 자신들의 군사력 수준을 낮추어야 한다고 느낄 것”이라고 했다. 1957년 6월 21일 유엔군 사령관 램니처와 주한 미 대사 다울링은 진해에서 이승만을 만나 주한미군에 ‘현대 무기’를 도입하면서 한국군을 감축할 계획이라고 전달했다.

이승만은 현대 무기 선 도입을 주장했다. 6월 24일 대통령 아이젠하워에게 편지를 보내 “통일을 이룰 때까지 현재의 병력 수준을 유지해야 하며, 감군에 대한 고려는 한국군 현대화 프로그램이 한국군에 전달된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라며 한국군에 ‘현대 무기’를 먼저 도입해야만 감군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정부와 군부뿐만 아니라 의회와 지역 사회의 광범위한 ‘감군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1957년 8월 23일, 자유당과 국민회 중앙총본부는 “현대화 없는 국군 감축을 반대한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8월 24일에는 국회 국방위원회도 “우리 국군의 현대화가 구체화 되지 않는다면 우리 국군을 감축시키려는 여하한 시도에 대하여도 반대”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냈다. 9월 초에는 감군반대 국민궐기대회가 철원, 광주, 공주, 광양, 예산 등 전국 32개 지역에서 열렸다.

‘직장 없어 비관, 제대 군인이 자살’, 경향신문 1956년 4월17일자 3면 보도. 실명과 주소는 지웠다.

이동원은 한국 사회의 이러한 감군 반대운동의 배경을 두고 “북한에 대한 군사적 우위 상실의 우려에서만 기인한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 배경에는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이후부터 사회 문제화되었던 제대군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1956년에만 직장을 알선해줘야 할 제대군인은 약 2만 명이었다. 군사원호법은 입대장정의 입대 전 직장을 법적으로 보장했다. “기업가들에 대해서 군사원호법의 이행을 강경히 강조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골탕먹는 것은 제대군인들”이었다. 생활고와 실직 때문에 자살 내지 미수 사건이 이어져 사회 문제가 됐다.

A씨는 7년 동안 해병대 헌병으로 복무하고 1955년 12월 만기 제대되었으나 3개월 이상 일자리가 없는 것을 비관해 자살을 시도했다. 한국전쟁 때 입대한 B씨는 1956년 4월 초 제대한 후 일자리를 구하려고 동분서주했으나 두 달 가까이 직장을 얻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성 희생자도 나왔다. C씨는 상이제대한 남편의 무직 상태와 생활 곤궁을 비관해 죽었다.

제대군인의 생활고 문제는 1956년 11월 기준 4년 9개월 이상 복무한 사병 중 희망자 전원에 대한 제대 조치를 완료하고, 1957년 8월 말까지 3년 이상 복무한 전원의 제대 시행을 결정하면서 더 심각한 문제가 됐다.

한국군 감축과 현대무기 도입을 두고 벌어진 한미 양측의 논쟁은 1958년 2월 28일 합의로 끝이 난다. 1959년 말까지 한국군 병력 상한선 72만 명을 63만 명으로 감축하는 내용이었다. 감축 대가로 한국에는 전술 핵무기가 배치됐다.

“전술 핵무기인 어네스트 존(Honest John)을 보유한 제100야전포병대대와, 280mm 원자포를 보유한 제663포병대대의 한국 배치를 통해 주한 미 제7보병사단과 제24보병사단의 펜토믹 사단화를 정식으로 허가했다. 주한미군이 사용할 전술 핵무기의 한반도 배치는 1958년 1월에 시작되었다. 1958년 주한미군은 핵탄두와 일반 탄두를 모두 발사할 수 있는 지대지 로켓포인 어네스트 존 7문과 280mm 원자포 6문, 8인치 박격포 56문을 한국에 들여왔다 게다가 주한미군의 전술 핵무기는 점차 마타도어(Matador) 크루즈 미사일, 핵파괴탄(Atomic demolition munition, ADM), 핵지뢰 등으로 확대되었고, 한국은 대만에 이어 마타도어 크루즈 미사일을 배치한 두 번째 동아시아 국가가 되었다.”

이동원은 “이 시기 남·북한에서 제기되었던 ‘평화’ 담론, 혹은 평화통일론 등에 주목한 연구들이 상당히 축적되었지만 이를 군비 축소라는 실체적 변화와 함께 설명하거나 한반도 차원에서 조망한 연구는 많지 않다”며 “(이 연구는) 정전협정 70주년이 된 현재까지도 북핵과 사드(THAAD)로 인해 군비 수준이 점차 고도화되고 있는 한반도의 군비 축소와 평화 정착 가능성에 대한 역사적 탐색의 차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동원은 이 논문을 16일 정전 70주년 학술회의 ‘한반도 정전체제의 형성·변동과 평화기획’에서 발표한다.

이 논문에서 다루진 않았지만, 북한은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남북한 외국군의 동시 철수와 군축을 제안한다. 1960년대 다른 한쪽으론 ‘전 인민의 무장화’, ‘전군의 간부화’, ‘전 지역의 요새화’, ‘전군의 현대화’ 등 군사력 증강을 위한 4대 군사노선을 채택했다. 1960년대 잦은 도발을 감행하기도 했다.

북한의 국가예산대비 군사비 비율은 1956년 12.98%, 1957년 12.3%, 1958년 9.8% 등 점진적으로 하락하였지만 절대 군사비 액수는 1956년 1억2400만원, 1958년 1억2900만원, 1959년 1억3100만원으로 증가(차두현 2007년 논문 ‘북한 당군관계의 변화과정; 그 변화의 동인과 그 의미’ 중)했다는 점도 아울러 봐야 할 듯하다.

정전 70주년 학술회의는 국사편찬위원회와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주최로 16일 오후 1시 서울글로벌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개최됐다. 한모니까(서울대)는 ‘1950년대 군사정전위원회의 활동과 정전체제의 형성’, 김도민(강원대)은 ‘1953~57년 중립국감독위원회의 활동과 북한의 대응’, 한상준(아주대)은 ‘1970년대 초반 북·중 관계와 한반도 정전체제’, 신재준(전주교대)은 ‘1970년대 초 <漢陽(한양)>‧<コリア 評論(코리아평론)>의 한반도 정세 인식과 통일론’을 발표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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