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쇼유도’는 조선의 ‘소유동’에서 나왔을까?
[서울&] [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조잔, 조선통신사 권칙과 만남과 교류
시센도의 시선당 시화, 권칙 영향 뚜렷
정원 조성은 석주 권필에게 영‘ 감’ 받은 듯
권필의 문학, 조카 권칙 통해 일본 전래
두보 시에 나오는 ‘소유천’에서 비롯
권필, 강화 초당 원림에 소유동 명명
조잔, 시센도 후원 짓고 쇼유도라 이름
두 사람의 문학과 정원, 비교 연구해볼 만
17세기 에도시대 초기에 일본에서는 지식계층 사이에 중국 문화 붐이 일어났다. 지난 회(연재 27회)에 소개한 문인정원 시센도(詩仙堂)는 일본 한시를 개척한 이시카와 조잔이 절친인 유학자 하야시 라잔(林羅山) 등과 함께 ‘중국풍’에 심취했던 대표적인 문예살롱이었다. 시센도 표문에 걸려 있는 편액 ‘쇼유도’(小有洞)는 그 시대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물이다.
쇼유도, 즉 ‘소유동’은 중국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곳’을 가리키는 ‘小有洞天’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 시문학에서는 ‘시성’(詩聖) 두보가 ‘小有天’을 이상향을 뜻하는 시어로 사용했다. 두보는 이 시에서 “작은 띠집 하나 짓고 흰 구름처럼 살다 가고 싶다”는 바람을 읊었는데, 이는 조잔이 시센도에 소유동이란 편액을 지은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소유동을 정원 이름으로 사용한 사람이 조잔에 앞서 조선에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 시인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1612)이다. 석주는 강화도에 초당을 짓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잇던 시절, 초당 근처에 원림(園林. 집터에 딸린 조선식 자연풍경 정원)을 꾸미고 두보의 시에서 이름을 따와 소유동이라고 한일을 시에 남기고 있다. 조잔이 시센도를 짓기 30여 년 전 일이다.
석주와 조잔은 만나거나 교류한 적이 없고 살았던 시공간도 다른데 정원 이름이 같은 것은 두보를 사숙한 이들 사이에서 발생한 우연의 일치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겠다. 그러나 시센도를 둘러본 필자는 이를 우연의 소산으로만 여기지 않게 됐다. 요컨대 필자는 조잔이 시센도를 짓고 정원을 꾸밀 때 조선 시인 석주의 시와 원림으로부터 적지 않은 영감을 얻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정원의 나라’ 일본의 대표적인 문인정원에 조선 시인의 시와 원림이 깃들어 있다고 ‘주장’한다면 지나친 내셔널리즘일까?
석주의 소유동과 조잔의 소유동이 영향 관계에 있다고 보는 필자의 추론에 나름의 근거가 없을 수 없다. 우선 일본을 방문한 조선문사 국헌 권칙(1599~1667)의 존재이다. 조잔은 1636년 조선통신사 일행이 교토를 지날 때 이문학관(시문으로 사신을 보좌하는 수행원)으로 통신사를 수행한 국헌과 최소 2번 이상 만났다. 조잔은 국헌을 초대해 시를 창화(한 사람이 한시를 읊으면 상대가 한시로 응수하는 것)하고 조선의 문학 동향 등에 대해 문답했는데, 조잔은 나중에 이 기록을 모아 <조선필담집>이라는 책까지 출판했다. 당시 조잔은 16살 연하의 국헌을 ‘시학교수’라 부르며 깍듯이 예우했고, 한시에 능한 일본인을 별로 보지 못했던 국헌은 조잔의 시를 보고 ‘일동지이두’(日東之李杜. 일본의 이백과 두보)라고 상찬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문학적’ 영향 관계는 국헌이 지은 <시인요고집>(詩人要考集)이라는 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시인요고집>은 국헌이 중국 시인 50명의 초상을 직접 그리고 대표 시 한 편을 독특한 형식으로 써넣은 시화집인데, 통신사로 일본에 갈 때 가져간 것이었다(구지현, ‘권칙 찬 ‘시인요고집’의 일본 전래와 간행의 의미’, 2009, <영주어문> 제18권). 지난 회에 소개했듯이 조잔이 1641년에 지은 시센도는 대표적인 중국 시인 36명의 초상과 시를 전시해 놓은 방이다. 이 시센도에 걸린 시화와 국헌이 남기고 간 <시인요고집>의 시화를 비교해보기 바란다.(사진) 그 영향 관계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국헌 권칙 선생이 바로 석주 권필 선생의 조카라는 사실이다. 비록 20여 년 전 사거한 인물이지만, 당시 개인적으로는 친삼촌이고, 문학으로서는 스승 같은 대선배이자 조선 시단의 총아였던 석주의 시문을 자신이 ‘일본의 이백과 두보’라고 치켜세운 조잔에게 소개했을 가능성은 ‘없다’보다 ‘있다’ 쪽이 훨씬 개연성이 높지 않을까?
조잔은 국헌과의 교류를 통해 조선 시인 석주의 존재와 시문을 알게 되었고, 나아가 석주의 문집 <석주집>(1631)도 접했을 것이다. 국헌과의 만남 5년 뒤인 1641년 조잔이 시센도를 완성할 때 <시인요고집>을 참조해 방을 꾸미고 정원에 ‘소유동’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결코 우연의 소산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소유동이라는 명명을 둘러싼 두 시인의 시를 여기서 살펴보자. 우선 석주의 시.
“만고의 구지라 작은 동문(洞門)에는/ 한쌍의 시냇물이 운근(雲根)에서 쏟아진다/ 무단히 하룻밤 일천 봉우리에 비가 내리니/ 바위에 부딪쳐 요란할 폭포 누워서 상상한다.
-초당으로부터 시내를 따라 남쪽으로 백보 남짓 가면 작은 석문이 있고, 한 쌍의 폭포가 겨우 몇 척 높이로 어지러운 바위 사이에서 아래로 작은 못에 떨어지며, 산세가 빙 둘러 있어 하나의 별세계를 이룬다. 내가 일찍이 두보의 ‘만고에 구지의 굴은, 가만히 소유천과 통한다’(萬古仇池穴 潛通小有天)는 구절을 따서 그 땅의 이름을 소유동(小有洞)이라 지었다.”
조잔도 시센도에 후원을 짓고 그 이름을 소유동이라고 한 내력을 시로 남기고 있다.
“인생을 자연에 맡기고 남은 생 한가로이 보낸다/ 연못에 손 넣으면 물고기가 의지하고 정원에 서면 나비가 어깨에 내려앉네/ 오래된 집에 밥 짓는 연기 오르고 저녁 햇살 벗어진 이마를 비추어주네/ 그윽하고 깊숙함에 옛 기산과 영수를 겸했으니 소유천 가는 길 이곳에 있으리라(猶通小有天)”
두보의 ‘소유천’(小有天)을 결구로 빌려 누옥(시센도)을 묘사한 이 시에 조잔은 ‘후원에 문을 내고 이름을 소유동이라 한다’(後園有門名小有洞)는 부제를 달아놓고 있다.(사진 참조) 원림을 꾸미고 소유동이라고 이름한 석주의 일을 옮겨놓은 듯이 흡사하다.
정원과 관련해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석주도 조잔 못지않게 정원 가꾸기에 일가견이 있던 사람이라는 점이다. 석주 연구가인 정민 한양대 교수에 따르면, 석주는 “초당 주변에 소박한 형태로나마 자연 공간을 십분 활용한 원림을 조성하려고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다. 초당 주위에는 소나무와 밤나무를 심었고, 샘을 파서 차를 끓여 마시며, 둘레를 조경하여 못을 만드는 등 깊은 애정을 갖고 주위를 가꾸었다”고 한다. 또 강화도 <석주권선생유허비>(1739)에는 소유동을 비롯해 앵도파(櫻桃坡), 반환정(盤桓亭), 2단 연못 등 선생이 조성한 원림 유지가 고을의 명승이 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편, 조잔의 부제 내용으로 볼 때 시센도 표문에 걸려 있는 쇼유도 편액은 본래 후원에 걸려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잔이 시센도를 지을 때 조선이나 중국식 후원을 짓고 이름을 소유동이라 했는데, 조잔 사후(아마도 시센도가 절이 되면서) 후원이 없어지고 편액도 표문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조잔이 꼽았다는 ‘오토쓰카(시센도) 10경’의 제1경으로 소개되는 ‘쇼유도’도 표문의 경관이 아니라 본래는 후원 경치의 아름다움을 자찬한 것이었으리라.
오늘날 조잔의 정원 ‘쇼유도’는 일본인들의 명정으로, 세계인의 명소로 아낌을 받고 있다. 가난했던 석주 권필의 강화 원림 ‘소유동’은 유허비만 잡초 속에 서 있을 뿐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아쉬운 마음에 문득 이는 바람이지만, 언제고 석주 초당과 원림이 조선의 문인정원으로 복원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교토의 시센도에 석주와 조잔의 시가 두보와 함께 나란히 걸리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일본 사람들에게도 필자의 바람을 전하고 싶다. 시공을 초월한 3인의 창화에, 서구인들은 동양의 진수를 눈에 담고, 한국인과 중국인은 우정을 가슴에 담아 갈 것이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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