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장 곳곳에 "제복 입은 슈퍼맨"…시계 풀어주고 수험생 태우고 '질주'
"어머 어떡해! 학교를 잘못 왔어."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치러지는 16일 오전 7시55분쯤 인천 동구의 한 고등학교 앞. 고3 남학생이 얼굴이 사색이 된 채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학생은 엄마에게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 "학교를 잘못 찾아왔다"며 "15분 남았는데 큰일났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근처에서 교통 정리를 하던 인천 중부경찰서 송림지구대 소속 나승건 경장, 천수미 순경이 옆 통화 소리를 듣고 학생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학생의 사정을 듣고 곧바로 순찰차에 태웠다. 시험장까지 거리는 5.4㎞. 차로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전속력으로 달린다 해도 늦을 수 있는 다급한 상황. 나 경장은 "우선 믿고 타라"며 학생을 안심시켰다.
학생은 초조한 마음에 순찰차에서 휴대폰 시계만 보고 있었다. 나 경장은 비상등, 사이렌을 울리고 창문 밖으로는 계속 수신호를 했다. 부득이하게 신호 위반을 해도 시민들은 곧장 길을 비켜줬다. 교통 정리 중인 모범 운전자들도 순찰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차량 통제를 해줬다.
시험장에 도착하고 보니 시간은 오전 8시3분이었다. 8분 만에 현장에 도착한 것이다. 학생은 그제서야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나 경장은 "학생이 제 시간이 수능 시험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도움이 됐다고 하니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서울 성동경찰서 서울숲지구대에도 이날 오전 7시42분쯤 고3 남학생 두 명이 문을 열고 다급하게 들어왔다. 두 사람은 "광진구에 있는 학교에서 시험을 봐야 하는데 버스를 놓쳤다"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들에게 남은 시간은 30분. 당시 지구대에 있던 김홍주 경사와 이경원 경사가 바로 순찰차에 학생 두 명을 태웠다.
서울 성동구 영동대교 북단쪽에 들어서니 도로에 차가 꽉 차 있었다. 김 경사는 이곳에 가만히 있다가는 20분 이상 걸리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차량 뒷쪽에 앉은 학생들은 다들 창가에 몸을 바짝 내밀고 안절부절 당황한 모습이었다.
김 경사는 사이렌을 울리며 주변 차량에 통행로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다행히 시민들도 빠르게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내어줬다. 그는 주변을 살피며 안전하게 역주행 하는 등 빠른 조치로 8분 만에 시험장에 도착했다. 고3 남학생들은 연신 "감사하다" "시험 꼭 1등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수능 전날에도 미리 차량 점검도 하고 경보등이 잘 울리는지도 확인했다고 한다. 운전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학생들에게 "걱정 말아라" "무조건 제 시간에 보내주겠다"며 불안감을 달래주기도 했다. 김 경사는 "제가 불안해하면 아이들도 불안해하니까 계속 안심시켜주려고 했다"며 "시민들이 도와줘서 가능했다. 학생들을 도와줄 수 있으니 오히려 제가 더 뿌듯하다"고 말했다.
서울 성동경찰서 응봉파출소 소속 김호방 소장은 이날 오전 일찍부터 서울 성동구의 금호고등학교에 도착해 수능 교통 안전 관리를 하고 있었다. 한창 수험생들이 등교하던 오전 7시35분쯤 한 학부모가 그에게 다급히 달려왔다. 고3 딸이 집에 손목 아날로그 시계를 놓고 왔는데 어디서 구할 수 있을지 물어봤다.
당시 김 소장에겐 손목 시계가 없었다. 함께 지원 나온 경찰들도 대부분 디지털 스마트 워치를 착용하고 있었다. 학부모가 사는 곳은 서울 송파구 잠실 쪽. 지금 당장 출발해 집에 다녀온다고 해도 입실 시간을 맞추긴 어려워 보였다.
김 소장은 왕십리역 광장에서 수험생 수송 지원 근무 중이던 금호1가동 자율방법대 심기섭 대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다행히 심 대장은 손목에 시계를 착용하고 있었다. 심 대장은 왕십리역에서 학교까지 1.7㎞가 되는 거리를 직접 운전해 자신의 시계를 건넸다.
오전 7시40분쯤에는 광진구에서 온 또 다른 학부모가 김 소장에게 손목 시계가 있는지 물어봤다. 그는 이번에는 심 대장 지인들을 수소문해 또 다른 시계를 찾아냈고 한양지구대 순찰차를 통해 배달을 부탁했다. 시계는 오전 8시 전 학교 앞에 무사히 도착해 학생에게 전달됐다.
올해 32년째 경찰 생활을 하고 있는 김 소장은 매년 수능이 다가오면 자신도 긴장이 된다고 했다. 그는 "시계가 없었으면 안절 부절하면서 시험을 봤을텐데 그래도 도움이 됐다고 하니 마음이 놓였다"며 "재빠르게 조치를 한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서울 동작경찰서 흑석지구대에도 이날 오전 7시53분쯤 한 수험생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영등포구에서 수능을 봐야 하는데 카카오택시가 안잡혀서 왔다"고 말했다. 당시 지구대에 있던 정명렬 경위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로 순찰차로 향했다.
입실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약 15분. 서울 동작구에서 영등포구까지는 약 20분 정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는 순찰차 마이크를 들고 "여기 수험생이 타고 있어요. 비켜주세요"라고 몇 번이고 외쳤다. 하지만 출근 시간대와 겹치면서 주변 차량들도 길을 잘 내어주지 않았다.
정 경위는 그동안의 경찰 노하우를 살려 아파트 구석구석 골목길을 활용했다. 그는 "경찰 근무를 오래해서 어느 도로가 막히는지, 안막히는지 잘 알고 있다"며 "2차선 도로 때는 자동차들을 좌우로 피해가며 빠르게 달려갔다"고 말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시험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3분. 20분 거리를 10분 만에 도착한 셈이었다. 학생은 연신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아들뻘 되는 학생이 어제 긴장해서 한숨도 못자다가 오늘 늦게 일어났다고 하니 안쓰러웠다"며 "수능은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날이지 않느냐. 경찰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말했다.
김지은 기자 running7@mt.co.kr 김성진 기자 zk007@mt.co.kr 박상혁 기자 rafand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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