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욱 칼럼] 백년대계의 R&D 정책이어야!

한겨레 2023. 11. 16.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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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욱 칼럼]우리 사회가 성숙으로 가는 길목에서 연구개발에 대한 짜임새 있는 획기적 지원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그나마 예산도 나눠먹기와 선심 쓰기로 빼돌리려 한다. 이번 예산안에서 연구개발 예산을 대거 깎고 기초과학 연구와 인문사회 분야 예산을 일일이 들추어 큰 폭으로 삭감해버린 윤 정권의 맹목성은 명확하다.

안병욱 | 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

 정부는 2024년도 연구개발(R&D) 예산을 올해보다 5조2천억원이나 삭감한 25조9천억원으로 편성해 국회에 제출했다. 지난 6월까지도 2% 정도 증액하는 안이었는데 불과 한달여 사이에 뜯어고쳐 16.6% 삭감했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생뚱맞게 연구개발 예산을 향해 “나눠먹기식”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윤 대통령은 국회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2019년부터 3년간 10조원이나 증액된 연구개발 예산을 구조조정하고 3조4천억원을 마련해 사회적 약자와 취약계층의 생계급여와 양육비, 저소득층의 장학금 등으로 배정했다고 했다. ‘연구개발 투자가 19.7조원에서 31.1조원으로 연평균 10.9%씩 급증했지만, 성과가 미흡’하고, ‘나눠먹기식 운용’과 ‘폐쇄적으로 국내 연구진·자금 중심 연구체계’로 집행됐기 때문에 이를 구조조정한다는 것이다. 기둥 뽑아서 아궁이에 불 땔 모양이다.

이에 국회예산정책처는 검토보고서에서 연구개발 예산의 급격한 삭감은 ‘순차적 연구의 예측을 불가능케 하고 민간기업의 대응투자를 어렵게 해 연이은 혼란을 초래할 것이며, 또 중장기적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기존 투자 성과도 매몰시킬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정부 제출 연구개발 분야 2025~2027년 예산안’은 전체 규모만 제시하고, 세부 분야별 규모는 구체적인 계획을 담고 있지 않아 기획재정부에 관련 자료를 요청했지만, 기재부가 자료 제출을 거부하고 있다고 밝혔다. 예산정책처는 정부가 분야별 규모에 대한 구체적 계획도 없이 전체 규모만 대폭 축소해버린 것이라면서, 정부 스스로 연구개발 예산에 대한 뚜렷한 방향도 실제적인 목표와 전략도 마련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명확한 근거·기준도 없다는 점을 확인해줬다며 조롱하듯이 비판했다.

그 와중에도 정부는 시급성이나 활용 가능성도 적은 신규과제들 예산을 편성하였고, ‘글로벌 연구개발’의 경우 올해 5075억원에서 내년 무려 2조8천억원으로 5배 이상 늘렸다. 구체적 사업 내용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왜 느닷없이 글로벌 항목을 신설하거나 대폭 부풀리는 졸속 작업을 서둘러 진행하는가. 잦은 해외 순방길에 선심 쓰고 생색내려 한다는 의심은 ‘나눠먹기’ ‘이권 카르텔’과 어떻게 구별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문제는 과학기술 분야에만 있지 않다. 의학·화학·생물·수학·우주·지구과학 등 기초과학 분야에서 1537억원이나 삭감해, 관련 학계는 그동안 정교하게 구축된 연구 인재들의 성장 사다리와 함께 기초과학연구 생태계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항의하고 있다. 역대 정부에서도 거의 바닥이던 인문사회기초연구 예산은 55억원 감액된 2359억원으로 편성하였다. 여기엔 글로벌융합연구 지원이라는 신규 항목 160억이 포함돼 있어 실제론 215억원을 삭감한 셈이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이공계 연구개발비의 1%에 불과한 인문사회 부문 연구 지원을 확대하라고 지속해서 요청해왔음에도 이번에 오히려 더 줄어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졸속과 난맥은 당국자들의 모자란 학문과 학술 인식에서 초래된 것이다. 연구개발의 의미와 가치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장논리와 경쟁의식에 찌든 사고로는 31조원은커녕 25조원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국가 연구개발 정책을 두고 ‘인간, 문화, 사회에 대한 지식을 집적하고 향상하기 위한, 그리고 지식을 통한 새로운 응용을 창출하기 위한 창의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연구개발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활동이지만 시장에서 사업적 이익을 기약하기 쉽지 않기에 국가가 정책적으로 기술개발의 불확실성과 위험성을 안고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대 정부에서는 재정 5%를 연구개발에 지원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꾸준히 추진해왔다. 국가가 시장의 외면과 실패의 위험을 보완하기 위해 인적·물적 제도 지원책을 세우고 산업·학계·연구소 간 협력을 이끌면서 예산을 투자해왔다. 그동안은 선진산업국의 앞선 기술을 따라잡는 데 매진해왔고, 그런 노력으로 지금은 격차가 크게 줄어 부분적으로는 우리 기술이 세계를 선도하기도 한다. 바야흐로 우리나라 연구개발 성과가 국제적으로 상위 수준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정부가 목표로 내세운 선진 과학강국의 위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기초과학과 인문사회학 수준도 그에 상응해야 한다. 뒤따라 편승해 갈 때와 앞장서 갈 때는 수행할 과제의 차원이 다르다.

오늘날 인구절벽, 고령화, 문화융합, 글로벌 다문화 소통, 인공지능(AI) 등으로 인류 사회는 미증유의 문명사적 변화를 겪고 있다. 이에 따른 과제들은 선진국을 모방해 대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문사회 학술 기반 위에서 성립되는 창의적 지식이 없이는 문턱을 넘어서기 어렵다. 극적인 성장을 이룬 우리 역사를 기반으로 주체적 사유와 성찰을 통해 학문적 성과를 축적하고, 이를 세상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

현재 세상 사람들이 매료되는 우리의 영화, 음악, 드라마 등 ‘한류’란 어쩌면 이미 발현되고 있는 그런 성과일 것이다. 이를 확산하면서 더욱 튼튼히 지속하기 위해선 학술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 학문은 아직 이런 한류를 뒷받침할 충분한 역량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다. 세계적이면서 주체적인 학문 담론을 생산하지 못하면, 한류 또한 동력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 사회가 성숙으로 가는 길목에서 연구개발에 대한 짜임새 있는 획기적 지원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그나마 예산도 나눠먹기와 선심 쓰기로 빼돌리려 한다. 이번 예산안에서 연구개발 예산을 대거 깎고 기초과학 연구와 인문사회 분야 예산을 일일이 들추어 큰 폭으로 삭감해버린 윤 정권의 맹목성은 명확하다.

이른바 정권인수위의 ‘윤석열 정부 110대 국정과제’는 온갖 구호들을 집대성한 집권 5년의 청사진으로 ‘과학기술 5대강국 도약’에서부터 ‘세계문화유산 등재 52건에서 65건으로 확대’ 등 학술연구의 뒷받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을 줄줄이 나열하고 있으면서도, 그 어디에도 학술 진흥이나 기초학문 육성을 하겠다는 말은 없다. 위정자들에게 백년대계의 안목으로 기획한 미래 전망의 국정운영이 담겨 있는 예산안을 기대하는 일은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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