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일 “현생의 ‘디오니소스 로봇’은 백남준…무대는 그에 대한 오마주”
24일 전국 공연 ‘대단원의 막’
장르 융합하고 영상·무용 덧입혀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디오메트로, 폴리고노스, 트리고노스, 브로미오스.”
정결한 흰 옷을 입은 세 마녀가 알 수 없는 말들로 주문을 외기 시작한다. ‘죽음과 부활의 신’인 디오니소스의 수많은 이름들. ‘어머니가 들인 자’ 디오메토로, ‘거듭 태어난 자’ 폴리고노스, ‘세 번 태어난 자’ 트리고노스, ‘소란스러운 자’ 브로미오스…. 광기로 치닫는 주술의 소리에 등근 달이 떠오르면 굉음이 울리며 마침내 신(神)이 온다. ‘둥, 둥, 둥’
“만약 이 시대의 예술가 중 ‘디오니소스 로봇’을 꼽으라면 그건 백남준 선생님이에요. 이 작품은 어쩌면 백남준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죠. 현대와 전통의 충돌, 디지털적이면서도 아날로그적인 면모를 두루 가지고 있는 예술가죠.”
충돌와 융합의 향연이다. 가장 대척점에 선 로봇과 신, 전자악기와 자연의 소리를 내는 국악기, 정아한 인성(人聲)과 거친 랩이 뒤섞여 도발적인 무대를 만든다. AI(인공지능) 시대에 디오니소스를 불러온 무대.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미디어 콘서트 ‘디오니소스 로봇’이다.
이 무대는 원일 전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예술감독이 지난해 3월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위촉받아 초연한 작품으로, 현재 전국 투어 콘서트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달 20일 LG아트센터에서 시작한 공연은 오는 24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막을 내린다.
초연 당시 30분 분량에 6악장으로 구성됐던 무대는 단독공연으로 편성되며 60분 분량, 9악장으로 확장됐다. 이와함께 국악관현악이 중심이었던 ‘듣는 공연’은 근사한 ‘보는 공연’이 됐다. ‘미디어 콘서트’라는 타이틀이 붙은 만큼 공연은 미디어 아트를 결합했고, ‘디오니소스’ 역할로 무용수 모어(모지민)가 함께 했다. 장르의 융합은 음악 콘서트를 하나의 연극으로 확장됐다.
‘디오니소스 로봇’은 서로 다른 요소들이 뒤섞여 ‘원초적 본능’을 깨우는 공연이다. 원일 감독은 “AI 시대에 가지는 인간의 의미를 돌아보기 위해 로봇과 가장 반대되는 신화적 존재를 불러내 ‘광기’라는 코드로 풀어낸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9개의 악장은 디오니소스를 소환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마녀들이 주문을 외면 천지가 개벽, 디오니소스가 등장한다. 그를 통해 인간 안에 숨어있는 ‘디오니소스의 광기’를 깨워낸다. 1악장의 제목이 ‘새벽, 속삭임’인 이유다. ‘죽은 자’라는 이름의 디오니소스가 부활하는 장면이다.
“결국 디오니소스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에요. 자기 스스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이냐에 대한 질문이죠.”
원초적인 소리와 불협화음, 불규칙한 리듬이 담은 공연의 메시지는 동시대적이다. 디오니소스의 부활은 단지 ‘생명의 탄생’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세 마녀가 불러내는 ‘디오니소스’는 내 안에 잠들어 있는 ‘태초의 나’, 즉 꿈을 잃어버리기 전의 열정과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진 ‘나’다. 때문에 이들이 들려주는 음악은 ‘피로사회’에서 ‘자발적 노예’가 돼 자신의 본질을 잃은 사람들을 향한 각성이자, ‘내면의 광기’를 깨워 ‘나’를 바꾸는 행동을 실천하라는 주문이다.
메시지를 펼쳐내는 방식은 한 편의 신화이자 연극이다. 이번 공연에 함께 한 모어는 ‘디오니소스’이면서 ‘태초의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존재는 ‘신의 한 수’였다. 모어는 원일 감독이 작곡한 세계를 몸짓과 춤으로 시각화했다.
원 감독은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각각의 악장이 담는 서사와 메시지를 설명해주며 어떤 동작들을 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며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온전히 모어의 것이었다”고 말했다. 연습 내내 원 감독은 모어를 ‘나의 디오니소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공연에선 그의 움직임을 따라 디오니소스의 시선을 담아낸 영상을 함께 상영한다. 이 영상은 공연을 함축적으로 표현해 관객들의 이해를 돕는다. 영상의 디자인은 올리버 그림과 다한이 맡았다.
마녀들에 의해 눈을 뜬 ‘도취와 광기의 신’은 신비로운 광경을 마주하며 세상의 다양한 생명에게 경외감(2악장 ‘웨이크 업 미러(Wake up mirror)’)을 품는다. 모어의 원초적인 움직임은 거칠고 현란하게 이어지는 음악, 불규칙적이면서도 규칙과 반복이 숨어있는 연주 안에서 상징적으로 펼쳐진다.
움직임은 곧 각성이다. 세계를 관찰하며 그는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인 ‘위대한 사냥꾼’ 자그레우스의 본성을 꺼내 ‘사냥의 시간’을 갖는다. 분량이 확장하며 가장 길어진 악장이다.
원 감독은 “3악장에선 음악의 장르가 힙합적으로 변하며 랩을 하고 연주자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춤을 추는 장면을 연출해 광기를 불러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3악장을 통해 원 감독은 “카니발리즘 코드를 넣어 목신처럼 숲에서 깨어난 디오니소스가 사냥을 통해 정복감을 맛보며 자신의 죽음까지 경험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고 했다.
음악적으로도 파격적인 형식을 띈다. 사운드가 부상하며, 급속도로 변화한다.
사냥을 마치면 4악장(D-패)에서 디오니소스 패거리들이 술을 마시며 몸을 움직이고, 5악장 ‘추리추리(댄스 댄스 댄스)’에 이르러 광기의 순간을 맞는다. 미니멀한 사운드 안에서 풀어내는 연속적인 리듬을 통해 천태만상 축제를 보여준다. 원일 감독은 “5악장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그림 중 ‘쾌락의 정원’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다양한 음향체가 누구라도 일으켜 세울 만한 순간이다.
‘광기의 밤’이 지나면 모든 것은 소멸된다. 삶과 죽음의 순간을 위한 레퀴엠이 울려퍼지는 때다. 주어진 악보에 따라 연주하던 악단의 단원들이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의 음악을 풀어내는 시간(8악장 시나위 봇)이기도 하다. ‘로봇’을 거부하고, 자신 안의 디오니소스를 깨운 자들이다.
한계를 뛰어넘어 자신을 시험한 연주자들은 “가장 자유로운 상태에서 나 자신의 연주”(원일)를 들려준다. 광기로 풀어낸 음악으로 혼돈의 시대가 지나면 디오니소스는 잠이 든다(9악장 빛의 말). 누군가의 부름에 깨어날 날을 기다리며 사라진다.
광란의 축제를 마치면, 한 번도 풀어내지 못한 응어리가 빠져나간 듯 진한 카타르시스가 찾아온다. 현대적 인간의 ‘실존 문제’를 고민한 이 작품은 원일 감독이 강조한 ‘시나위 정신’의 총체다. “행동을 통해서만 자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 로봇’의 발전 가능성은 무한하다. 극장의 크기를 늘려 소리를 실험하고, 사람으로 현현한 디오니소스를 AI시대의 흐름에 맞춰 로봇으로 연출할 수도 있다. 원일 감독의 향후 구상 중 하나다.
그는 “로봇의 등장을 통해 다양한 버전으로 확장하면서 이 안엔 인간의 원초적 에너지와 축제, 삶의 본질을 담는 것은 물론 공연장에서 두려움을 느낄 만큼 극단적인 지점의 표현을 공연예술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구상 중”이라고 말했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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