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풍파 견뎌낸 '아버지의 등' 같은 목포의 맛과 멋 [박동휘의 컨슈머 리포트]
1993년 여름이었다. 그 해 출간한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들고, 남도 여행을 떠났다. 남도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인 목포 유달산에 올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밤이었는데, 목포 도심이 마치 생일 케이크 같다고 느꼈다. 한밤의 목포는 촛불처럼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목포 토박이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목포의 매력은 ‘변하지 않은 낡음’이 아닐까 싶다. 목포역에서 시작해 미로처럼 이어지는 원도심 길을 걸어보면 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흙 담벼락과 낡은 지붕, 흑백 TV 시절에나 있을 법한 상가 간판은 마치 영화 세트장을 걷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가객 최백호는 부산역에서 어딘가 나처럼 늙고 있을 연인을 떠올렸지만, 목포역은 왠지 아버지의 등을 떠올리게 한다. 비록 좁아지고, 흐물흐물해졌지만 모진 풍파를 묵묵히 견뎌낸 굳건함 말이다.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목포의 멋’이 아닐까.
맛의 도시 ‘먹포’로 부활
요즘 목포는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목포해양대학교 인근 바다 전망이 일품인 유달산 중턱 대반동, 옛 일본 영사관 등 1897년 목포 개항 이후 조성된 시가지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근대역사문화공간엔 외지에서 온 듯한 젊은 남녀들로 북적인다.
한 TV 예능 프로의 영향 덕분인지 목포의 노포로 맛 기행을 오는 이들이 꽤 많다. ‘목포가 아니라 먹포’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간 목포의 맛은 해남, 강진, 여수, 순천 등 다른 남도의 도시에 비해 덜 알려졌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만, 목포 밥상만의 독특함이 그간의 소외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수십 가지 찬이 나오는 일반적인 ‘남도 밥상’과 달리 목포 사람들은 신선한 바다의 맛을 즐긴다. 그래서 반찬이 아니라 요리가 중심이다.
목포시는 지난 2019년 3월 ‘맛의 도시 목포’ 선포식을 열고 한국을 대표하는 맛의 고장으로 육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기반이 목포 9미인데, 모두 바다 요리다.
홍어삼합, 세발낙지, 민어회, 꽃게무침, 갈치조림, 우럭간국, 병어회·찜, 아귀탕·찜, 준치무침 등이다. 꽃게 속살에 소고기를 다져 넣은 꽃게무침으로 명인에 선정된 송성애 옥정한정식 대표는 유년 시절 엄마 밥상에 대한 기억을 묻자 “생선을 다양한 방식으로 먹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중깐, 쑥굴레…옛 영화를 상징하는 간식
목포는 예로부터 목이 좋은 곳이란 의미로 불렸다. 1897년 개항도 뜻깊었다. 강제적으로 문을 연 다른 항구와 달리 그 해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부국의 꿈을 이루기 위해 목포를 자발적으로 열었다. 항을 드나드는 선박에서 세금을 징수해 그 돈을 재원으로 개혁을 달성하고자 했다.
그래서 목포엔 전남 지역 최초의 근대 시설이 수두룩하다. 1898년 세워진 양동교회를 비롯해 목원동 일대에 북교초등학교, 청년회관, 우체사와 감리서 터 등 개항 후 근대문화 발달 과정을 엿볼 수 있는 문화 유산들이 즐비하다.
목포는 일제의 수탈 창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문물이 전라도 일대에 전파되는 창구가 됐다. 목포역을 나와 목포 상권의 중심이었던 오거리에서 선창 쪽으로 연결되는 도로로 진입하면 옛 지명이 상락동인 곳이 나온다. 사시사철 즐겁다는 의미의 동네다. 도로 주변에 극장, 백화점, 카페 등이 즐비했었다.
목포가 소비 도시로 커가면서 무안, 함평, 진도, 신안 등 인근의 신선한 물산이 목포로 모이는 건 당연한 순리였다. 그래서 목포엔 이름난 요릿집이 많았다. ‘목포 까사(주택) 1’로 불리는 창성장은 일제 강점기 목포에서 가장 번화했던 옛 대화정의 요릿집이었다.
목포 사람들이 ‘중깐’이라고 부르는 간짜장은 돈 많은 선장이나 건달들이 간식으로 먹던 ‘중화요리’다. 일반 간짜장보다 면이 얇아 불기 전에 재빨리 먹어야 제맛이다. 쑥을 빚어 만든 찹쌀떡 경단에 콩고물을 묻힌 후 묽은 조청에 굴려 먹는 간식인 쑥굴레도 옛 목포의 영화를 상징하는 간식이다.
충무공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고하도
목포의 숨겨진 유적 중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사적을 빼놓을 수 없다. 목포 바로 앞 고하도에 있는 이충무공기념비다. 대한민국 도슨트 시리즈의 일환으로 <목포>라는 책을 지은 최성환 목포대 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1722년 장군의 5세손이자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이봉상이 건립했다.
고하도는 진도 앞바다 명량에서 대승을 거둔 이순신 장군이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본진으로 삼았던 섬이다. 이곳에서 판옥선 40여 척을 건조했다고 한다. 최 교수는 “만약 고하도가 없었더라면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끌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썼다.
2019년 9월 유달산과 고하도를 잇는 해상케이블카 개통으로 고하도로 가는 길이 좀 더 다양해졌다. 전란 때 축조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 터가 섬 안에 아직 남아 있다. 고하도는 엉뚱한 거북선이나 판옥선을 전시한 다른 사적지에 비해 충무공의 숨결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목포를 대표하는 인물 중엔 예인이 유독 많다. 한국 근대극을 개척한 김우진이 목포 출신이다. ‘사의 찬미’의 가수 윤심덕과 함께 바다에 투신자살한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한국여성문학의 선구자인 박화성도 목포에서 나고 자랐다. ‘목포의 딸’로 불리는 이난영은 유달산 중턱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로 기억되고 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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