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내 시간은 없어… 이제 산에서 보상 받아"
마감에 쫓겨 부리나케 원고를 쓰다가 힘들고 짜증나고 괴로워서 밖으로 뛰쳐 나왔다. 열심히 산다는 것에 관해 생각했다. 동시에 나는 에베레스트산을 떠올렸다. 에베레스트가 제아무리 커봤자 지구라는 행성과 비교했을 때 그 크기는 종이 위에 볼펜으로 찍은 점 같다는 사실도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예전에 어떤 과학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보잘것없는 존재들. 지구 안에서 기를 쓰며 사는 게 대체 어떤 의미인가 싶었던 것이다. 그럼 뭐 어쩌란 말인가? 자, 우리 모두 대충 살아보자.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 딱 한 달만 집에서 가만히 있어 보자. 다같이 동시에 말이다.
얼마 안 가 전기가 끊어질 것이다. 수도가 잠기고 가스불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굶어 죽어 멸종할 것이다. 아, 살기 위해 계속 몰아붙여야 하는 삶이라! 끝내주게 정교한 인간 세상 시스템이여(잠깐만 멈춰다오)! 탄식하면서 나는 정신을 차렸다. 열심히 사는 건 나의 생존과 더불어 인류의 존속과 발전에 긴밀히 관여하는 것이라고 결론냈다. 산줌마 이병희(60)씨의 지금 삶을 곱씹었다. 은퇴하고 쉴 나이에 스펙 쌓듯 온갖 것에 정성을 쏟는 그녀를 생각하면서 나는 재빨리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야기 할머니의 고군분투
이병희씨는 자신을 '이야기 할머니'라고 소개했다. 무슨 말인가? 궁금했다. 그녀가 설명했다. "저는 지금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고 있어요. 그러니까 선생님이죠. 저를 만나려면 이 어린이집으로 와야 해요. 괜찮겠어요?" 나는 괜찮다고 했다. 내가 만난 산에 오래 다닌 산악인 중 이야기 할머니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흥미가 생겼다. 바로 인터뷰 날짜를 잡고, 약속한 날이 되자 사진기자와 나는 그녀가 일하는 천안으로 내려갔다.
천안의 한 어린이집 교실에 들어가니 열댓 명의 아이들이 두 줄로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병희씨가 나타나자 아이들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병희씨는 작은 의자에 앉아 자신이 가져온 가방에서 동화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아이들이 볼 수 있게 책을 펼쳐 들고 읽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이야기 시작, 우리 모두 신나게 잘 들어 보아요. 귀는 쫑긋 눈은 반짝, 준비됐나요? 하나 둘 셋 넷! 출발합니다. 빵빵!"
그녀는 현란한 손짓과 함께 TV 속 성우처럼 말했다. 아이들은 그녀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15분 동안 진행된 수업을 마치고 그녀는 어린이집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우리에게 다가오면서 말했다. "생소하죠? 이야기 할머니는 안동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하고 있는 사업이에요. 손녀가 우리 집에 오면 동화책을 읽어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지원했는데 덜컥 합격했어요." 그녀는 이 일이 꽤 힘들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읽어 줘야 할 분량이 담긴 대본이 있는데, A4용지로 3장 정도 된다.
매주 한 번씩 모두 외워야 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대본을 외울 때마다 '이걸 왜 하고 있지?'라면서 고민한다고 했다. 그녀에게 질문했다. "취미삼아 하는 일인가요?" 그녀가 대답했다. "취미이긴 하죠. 남편 사업장도 있으니. 오전에 잠깐 시간 내서 하는 거예요. 일주일에 세 번, 월·화·수요일이오." 우리는 그녀가 타고 온 승용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승용차는 주택가로 들어갔고 차는 얼마 안 가 연식이 오래돼 보이는 3층짜리 건물 앞에서 멈췄다.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건물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올라갔다. 우리도 따라 올라갔다. 집은 35평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방이 4개 였다. 그중 방 하나엔 등산 장비가 꽉 차 있었다.
우리는 식탁에 앉았다. 그녀는 우리 건너편에 앉았다. 이병희씨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엔 자신이 지금 맡고 있는 직책이 가득 적혀 있었다. 종이를 펴서 읽었다. 한국여성산악회 산행이사, 천안시 산악연맹 사무국장, 한국국학진흥원 이야기 할머니 활동 중, 한국문인협회 정회원, 시와 수상문학 대외협력부장 활동 중, 골프타임즈 '이병희 산행마루' 연재 중, 고령사회를 이롭게 하는 충남여성연합 활동 중. 등등. 그녀는 무려 7개 이상 단체에 소속되어 있었다. 맙소사! 나는 놀랐다. 단순하게 그녀를 '이야기 할머니 산악인'으로만 알고 있었다.
저 이력은 취업을 위해 스펙을 잔뜩 쌓은 20대 학생의 이력서에 쓰인 분량과 맞먹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자세히 알아보자. 이병희씨는 1963년 충남 아산시 선장면에서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동네에서 방앗간을 했고, 부족함 없이 자랐다(이병희씨는 옛날 방앗간 운영하던 집들이 대부분 부유했다고 덧붙였다). 어렸을 때 그녀는 유독 약했다. 학창시절 달리기를 하면 매번 꼴찌였다. 입이 짧아 먹는 것도 가렸다. "제가 편식이 심했어요. 큰오빠가 결혼한 다음 올케 언니가 저만을 위해 따로 김치찌개를 끓여 밥상에 올려줬어요. 지금 와서 생각하니 복에 겨웠죠. 언니한테 미안해요. 지금도 올케 언니는 환갑인 저를 위해 밑반찬을 만들어주고 김치도 담가줘요. 큰오빠가 세상을 떠난 지 꽤 됐는데도 그래요. 올케 언니를 생각하면 너무 고마운 한편 또 슬퍼요."
그녀는 중학교 때까지 여기서 살다가 언니 따라 서울로 올라가 고등학교를 다녔다. 언니들은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그녀는 언니들만큼 공부를 잘하진 못했다. 결국 대학생 때 언니들과 떨어져 천안으로 내려왔다. 천안에서 남편을 만났다. 동갑내기 캠퍼스 커플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병희씨는 독서 지도사, 유치원 교사로 일했다. 28세가 되어서야 결혼했다. "남편과 결혼 안 하려고 했어요. 당시 군대도 안 갔고 특별한 직업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남편이 저를 무진장 좇아다녔어요. 남편이 군대 갔을 때도 마음 먹고 기다린 게 아니에요. 저 혼자 여행 다니고, 놀고 하다 보니까 시간이 흐른 거죠. 어딘가에 구애 받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저는 혼자 뭘 하는 걸 굉장히 좋아했어요. 요즘도 혼자 캘리그래피를 배우거나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려고 공부하거나 하죠."
그녀는 젊었을 때 하고 싶은 걸 다 한 편이다. 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배우고 떠나고 싶으면 떠났다. 그중 지금까지 꾸준하게 하는 건 봉사활동이다. 그녀는 부끄러운지 "지금 당장 부족한 게 없어서" 봉사활동에 나선다고 얼버무렸다. 결혼하자마자 남편은 중식당을 차렸다. 중국요리집을 운영하면서 돈을 꽤 많이 번 친척이 권했다. 이후 고생이 시작됐다. 주방장들이 속을 썩였다. 이병희씨는 그런 주방장들이 일하는 걸 보고선 메모했다가 저녁에 남편에게 건네줬다.
남편은 아내가 준 메모를 참고하면서 가게를 운영했다. 장사는 잘됐다. 덕분에 건물을 4채나 샀다. 하지만 부부는 여전히 힘들었다. 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게 문을 닫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눈 뜨면 가게 가서 장사하고, 가게 문 닫고 집에 가면 바로 잠들었다. 가게 이름이 네 번 바뀌었다. 신신반점, 청솔각, 만리장성, 블랙데이. "이때 우리는 어디 투자할 줄도 몰랐어요. 돈이 생기면 바로 은행에 넣어두기만 했죠. 이걸 이용해서 분점을 내고 했다면 돈 엄청 벌었을 텐데 말이죠." 블랙데이를 끝으로 32년간 이어왔던 장사를 접었다.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산에 다니기 시작한 건 가게를 운영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부터다.
일이 익숙해지자 여유가 약간 생겼다. 평일 쉬는 날, 한 주에 한 번은 꼭 산에 가자고 남편과 약속했다. 건강을 챙기자는 목적이었다. 두 사람은 당시 천안 야우리백화점과 갤러리아백화점에서 진행하는 산악회를 따라다녔다. 처음엔 등산화와 배낭만 챙기고 잠깐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수준의 산행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 횟수가 많아지면서 부부는 산에 빠지게 됐다. 어느 순간 방 하나가 등산장비로 꽉 찼다.
"천안을 사랑해요"
그녀의 이야기를 대충 듣고 난 다음 나는 이 코너에서 꼭 하는 상징적인 질문을 했다. "산이 왜 좋죠?" 그녀가 대답했다. "갇혀 있다는 기분이었어요. 애들 키워야지, 남편 사업장 왔다 갔다하면서 도와줘야지. 식당 가서 전화 받는 게 진짜 싫었어요. 저는 지금도 전화 받는 게 싫어요. 그런데 산에 가니까 너무 좋았어요. 마냥 좋았어요. 무조건이오. 지금도 산에 가면 전화기 꺼놔요." "산에 가는 것이 좋은가요? 아니면 지금처럼 산악회 활동을 하는 게 좋은가요?" "당연히 산에 가는 게 더 좋죠. 저는 사람들하고 소통 같은 거 잘 안 해요. 저하고 맞는 소수와 어울리죠. 술 마시는 것도 싫어하고요. 남편이 저보고 반듯한 사람이래요. 연맹활동은 남편이 권해서 시작한 거예요. 행정적인 업무를 잘한다면서 해보라고 했어요. 남편이 잘한다고 칭찬하니까 계속 하고 있는 거죠."
"산악회 활동이 사업하는 데 도움이 됐을까요?"
"아니오! 전혀요! 우리 가게에서 산악회 모임 같은 거 해본 적 한 번도 없어요. 지인들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않고 아무 소리 듣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였어요."
"산악회에서 임원 활동을 하면 여러 사람에게 베풀어야 하는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회원들한테 밥도 사야 하고 술도 사야 하고 이런 식으로요. 본인이 직접 그러지는 않았나요?"
"저는 그렇게 안 했어요. 남편이 했겠죠. 남편이 돈 많이 쓰는 성향이에요."
그녀는 연맹활동이 부담스럽고 어렵다. 임기 4년을 마치면 그만두고 책 읽고 시 쓰는 일에 집중하고 싶다고 했다. 듣고 보니 남편이 뒤에서 은근히 부채질하는 게 아닌가 했는데, 한편으론 그것이 열심히 사는 원동력이라고도 했다. 따져보면, 사람이 뭔가에 집중하게 하고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에너지는 사랑 혹은 애정에서 오는 게 아닐까? 누군가는 이것조차 사람이 생존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사랑 따위는 없다고. 하지만 그녀가 지금 천안시 산악연맹에 쏟는 관심을 보면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이병희씨 집 장비방에는 산행용으로 쓰는 나침반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자주 잃어버린 탓에 잔뜩 사 놓은 건가? 아니면 나침반 모으기에 취미가 있는 걸까? 궁금해서 물어보니 충청남도 체육대회 때 나가는 연맹 선수들이 쓸 용도로 구입했다고 했다. 그녀는 최근 대회 준비로 바빴다. 연맹 사무국장으로서 챙겨야 할 게 많았다. "대한산악연맹? 이런 거 관심 없었어요. 예전에 코오롱등산학교에 다녔어요. 그런데 거기엔 천안만 쏙 빠져 있더라고요. 제주연맹, 경북 어디 연맹 등등 전국의 산악연맹 사람들이 다 있는데 천안만 없다는 걸 알았어요. 알아봤더니 연맹 활동이 뜸하다고 했어요. 다시 만들어보려고 했더니 결격 사유가 너무 많다는 거예요. 부족한 게 뭐냐고 물어봤죠. 필요한 서류 등을 다 챙겨서 제출했어요. 천안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었어요."
"혹시 단지 일하는 즐거움 때문에 연맹활동을 하는 건 아니고요?"
"일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지만 저는 맡은 일은 잘해요. 책임감이 있는 편이죠.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요약해 볼게요. 이번에 충청남도민체전에 나가는데, 체육회에서 지원금을 줘요. 500만~600만 원 정도요. 이 돈을 훈련기간 동안 선수들 식사비와 교통비로 써야 해요. 저는 이 돈으로 선수들 단복을 맞추고 일주일에 한 번은 식사로 고기 같은 걸 대접하죠. 이런 일을 요목조목 따지면서 하는 걸 잘해요. 솔직히 얘기하면 개인 돈 많이 썼어요."
"믿기지 않는데요? 오로지 천안을 위해서 개인 시간을 내고 신경을 쓰면서 희생한다고요?"
"네, 맞아요. 저는 천안 팬이에요. 축구 팀도 그렇고요. 천안FC 지금 꼴찌지만 맨날 응원 가요.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는 곳이니까 애정이 특별할 수밖에 없죠. 예전에 어떤 연맹 행사에 참석했더니 천안은 알아주지도 않더라고요. 당연히 기분이 나빴죠.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요. 제가 사무국장 그만두고 회장님 바뀌어도 잘 되겠다 싶더라고요.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번 충남도민체전 등산 종목에서 천안시는 5위를 기록했다. 그녀는 이 성적표가 굉장히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천안시산악연맹 SNS(네이버 밴드)에 그녀는 이런 식의 분위기를 담은 글을 남겼다. "팀워크가 좋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모두의 응원 덕분입니다. 우리는 거창하게 최고의 산을 정복하겠다는 꿈을 이룬 게 아니지만 현재 적당히 행복한,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자는 목적은 이뤘습니다."
정직하면 다 알아줘
"그동안 생활이 바쁘고 힘들었을 것 같은데 어땠나요?"
"고생 많았죠. 힘들고 버거웠어요. 스물아홉 살, 가게를 처음 오픈했을 땐 창피한 마음도 있었어요. 그래서 그때는 밖에도 잘 나가지 않았어요. 오로지 가게, 집, 가게, 집이었죠. 30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정신 없이 지나갔고, 40대 때가 정말 힘들었어요. 남편이 요리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니었으니. 본인도 배워가면서 하려니 오죽했겠어요? 그래서 많이 싸웠어요. 놀지도 못했어요. 두 달에 한 번 쉬었으니 30년 동안 저 자신을 위해서 뭘 한 게 없었어요."
"고생스러운 시간이 모두 끝난 것 같네요. 후련하신가요?"
"네, 후련해요. 지금 너무 좋아요. 굉장히 좋아요. 옛날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절대로." 지금 그녀를 행복하게 하는 건 시간 날 때 산행하고 글 쓰고, 시를 쓰는 일이다. 손녀딸을 보는 재미도 크다. 덕분에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나온다고 했다.
"시는 언제부터 쓰셨죠?"
"시는 고등학교 때부터 썼어요. 그냥 끄적대는 수준이었죠. 2002년쯤 '문학애'라는 곳에서 등단했어요. 신인상도 받았고요. 얼마 전엔 '시와 수상문학'이라는 데서 작품상도 받았어요. 글쓰기는 애들 독서지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혔어요. 아, 맞다! 서울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도 제 시가 걸려 있어요. 제목이 '능소화'예요."
"지금까지 살면서 후회되는 일이 있을까요?"
"음,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저 고등학생 때요. 엄마랑 같이 많은 시간 못 보낸 것, 잘해드리지 못한 것, 반찬투정 한 것 등이 떠오르네요. 지금 살아계신다면 정말 잘해 드릴 것 같은데."
"자녀들은 지금 뭘 하죠?"
"아들이 둘 있어요. 지금 다 컸죠. 큰애는 사진관을 하고요. 작은애는 경찰이었어요. 지금은 그만 두고 양복점을 해요. 둘 다 잘 살고 있어요."
그녀의 마음은 지금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꽉 차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배부르지 않고 또 배고프지도 않다. 만족감이 가득하다. 그녀는 행복하다고 했다. 그녀와 헤어지기 전에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다. 이건 꼭 물어봐야 했다.
"장사가 잘됐던 비결이 뭔가요?"
"정직한 거요. 저희는 손님에게 거짓말 같은 거 안 했어요. 좋은 재료로 좋은 음식을 만들면 다 알아주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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