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이 그린 풍경 속으로 가다 [나홀로 우리 땅 걷기 강진]
산, 바다가 어우러진 전남 강진은 수려한 자연경관과 문화유산이 가득한 곳이다. 바다와 어우러진 강진만생태공원이나 가우도, 초록의 향연이 펼쳐지는 강진다원. 암릉이 아름다운 주덕산과 덕룡산, 월출산 자락에 그림같이 펼쳐진 백운동원림, 다산이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초당, 고려청자의 산실 고려청자박물관 등 참으로 다양한 여행지가 있다. 게다가 낙지부터 장어, 짱뚱어탕, 전라도 한정식, 연탄불고기까지 다양한 먹거리를 즐길 수 있다.
산, 바다와 섬의 매력까지 느낄 수 있는 강진으로 소소한 걷기 여행을 떠나보자.
호남의 3대 정원, 백운동원림
윤선도의 부용동 정원, 양산보의 소쇄원과 더불어 호남의 3대 정원으로 불리는 백운동원림은 백운동 별서정원으로도 부른다. 조선 중기 처사 이담로(1627~1701)가 조영한 원림으로 '백운동白雲洞'은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다시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워낙 구름과 안개가 많은 월출산이라 이른 새벽이면 운해가 하늘로 오르는 모습은 언제라도 볼 수 있는 곳이니 어쩌면 백운동이란 이름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산이 18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한 강진은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백운동원림도 그중 하나다. 백운동 12경이 담겨 있는 '백운첩白雲帖'은 다산 정약용이 1812년 초의선사를 비롯한 제자들과 함께 월출산을 등반하고 백운동에 들러 하룻밤을 유숙한 후 백운동의 풍경을 시로 쓰고 그림으로 그린 시첩이다.
백운첩은 백운동도와 서시, 백운동 12경, 발문, 다산초당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백운동도는 초의선사가 그리고 서시와 발문, 백운동 12경 중 8수(옥판봉, 산다경, 백매오, 유상곡수, 창하벽, 정유강, 모란체, 취미선방)는 다산이 직접 짓고, 초의선사가 12경 중 3수(홍목폭, 풍단, 정선대), 제자 윤동이 1수(운당원)를 써서 총 12수의 시가 완성되었다. 백운동원림은 오랫동안 방치되어오다가 역사적 중요성이 부각되어 초의선사가 그린 백운동도를 참고해 옛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백운동원림으로 들어가는 마을길은 어릴 적 시골냄새가 그대로 난다. 성글성글 돌담은 참으로 정겹다. 이어서 애니메이션 영화의 배경으로 나와도 손색 없을 만큼 이국적인 느낌의 대숲이 펼쳐진다. 담양 대숲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꿈속 같은 대숲 길을 걸으며 대나무 잎들의 바스락거림에 취한다. 푸른 대숲 사이로 비치는 빛이 참 곱다. 참으로 몽환적이다. 바로 이 대숲이 제12경 운당원이다.
내원內園으로 들어서니 월출산이 감싸 안은 백운동 정원이 살포시 앉아 있다. 백운첩의 백운동 12경을 찾는 즐거움은 마치 학교 다닐 때 보물찾기를 하듯 호기심과 설렘이 가득하다. 제1경 옥판봉은 정선대에서 월출산을 바라보면 담겨지는 경치이다. 옥판봉은 백운동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월출산 자락의 봉우리이다. 살짝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외부의 아름다운 경치를 빌려온 셈이다.
특별히 계곡의 물을 끌어와 지당과 연결해 'ㄷ'자로 흐르는 제5경 유상곡수에 눈길이 머문다. 자연 친화적인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느끼게 해주는 별서 건축의 백미이다. 1경부터 12경까지 하나하나 찾으며 설명을 큰소리로 읽어본다. 색다른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백운동 주변에는 대나무뿐 아니라 동백나무, 아기단풍이 가득하다. 초록이 참 사랑스럽다. 이 숲을 걸어본 사람만이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있다. 넓지 않았어도 깊지 않았어도 백운동원림은 세상과는 인연을 끊은 듯 보인다.
작지만 아름다운 섬, 가우도
강진여행을 계획하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곳이 가우도. 강진만의 8개 섬 가운데 1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는 유일한 유인도이다. 강진읍 보은산이 소의 머리에 해당되고 섬의 생김새가 소의 멍에에 해당된다 하여 '가우도'라 부르게 되었다.
가우도에 입도할 때는 배나 차량을 이용할 수 없다. 걸어서 들어가야 하니 더 매력적이다. 가우도로 연결된 다리는 두 개뿐! 대구면에 있는 청자다리와 도암면에 있는 다산다리이다. 배를 타지 않아 섬이지만 언제라도 건너갈 수 있다. 섬은 작아도 펜션, 카페, 식당 등이 있어서 여행지로 전혀 불편하지 않다.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생태탐방로인 '함께해海길'은 총거리가 2.5km. 도보로 1시간에서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산과 바다를 감상하며 걸을 수 있는 트레킹 코스로 트레킹이라는 단어와도 어울리지 않는 그저 마실가듯 소소한 산책을 즐기기에 좋은 길이다. 어떤 사물이든 크기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장엄한 자연의 스케일도 좋지만 가우도처럼 아주 작고 소중한 자연도 너무나 멋지다. 잔잔한 바다의 파도처럼 잔잔한 행복을 전달해 준다.
다산다리에서 바라보는 가우도는 꿈속의 섬 같다. 포토 스팟도 여러 곳이라 걷는 재미를 더해준다. 길을 걷다가 잠시 바닷물에 발을 담그기도 하고 백사장을 걸어보기도 한다. 가우도 상징인 황가오리 조형물 앞에서 인증사진 한 장에 추억을 담아본다. 가우도 황가오리는 우아하고 커다란 날개를 가지고 있어 일명 황금 나비로도 불린다. 7~8월이 되면 산란을 위해 황가오리들이 수십 마리씩 몰려드는 전국에서 소문난 황가오리 산란지이다. 함께해海길에서는 강진에서 태어난 김영랑 시인도 마주한다. 바닷바람과 함께 김영랑 시인의 시를 읽어보는 즐거움도 색다르다.
청자다리를 건너오면 바로 가우도 모노레일이 기다리고 있다. 짚 라인이나 제트보트도 이용할 수 있다. 짚라인은 가우도 정상의 청자타워에서 체험할 수 있으며 강진만을 건너며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조망하기에 좋다. 액티비티를 좋아하는 사람은 도전해 볼 만하다. 모노레일을 타기보다는 걷기가 좋아서 함께해海길을 따라 천천히 가우도를 한 바퀴 걷는다. 가우도 안에 있는 작은 출렁다리를 건너기 전에 언덕에는 멋진 수국 포토 포인트도 있다. 그 옆으로 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너무나 편안한 대나무 오솔길이다. 새소리도 경쾌하고 대나무 잎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매력적이다. 10여 가구인 작은 마을을 통과하면 다산다리이다.
걷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본 가우도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바다에 홀로 떠 있는 작은 섬, 가우도는 세상과는 실낱같은 작은 다리로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 속세와는 연을 끊은 것처럼 보인다. 한국이라기엔 너무나 생경한 모습과 풍광이다.
갈대밭을 따라 걸으며 바다를 품에 담는 길, 강진만생태공원
익지 않은 초록의 갈대가 싱그럽다. 뻘도 무척 넓다. 탐진강과 강진만이 만나는 곳에 형성된 강진만생태공원은 둑이 없이 바다로 연결되어 있다. 열거하기에도 어려울 만큼 다양한 식물, 조류, 포유류, 어류, 각종 플랑크톤이 살고 있다. 남해안 최대 생태보고의 장이다. 갈대밭은 20만 평에 달한다. 초록 갈대밭은 생명의 기운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갈대 군락지에 만들어진 약 4km의 생태탐방로 데크길.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길이다. 갈대 사이로 자박자박 걷다가 쉬어 갈 수 있는 쉼터도 있다. 전망대에 오르니 저 멀리 백조다리조형물과 고니들이 보인다. 이곳은 국내 최대 고니 철새 도래지이다. 갈대밭을 걷다가 무심히 눈길을 준 뻘에는 수많은 짱뚱어와 게들이 놀고 있다. 강진만 바람에 몸을 맡긴 초록 갈대들의 춤사위를 바라보고 짱뚱어가 노는 모습을 멍하고 바라보고 있노라니 힐링이 따로 없다.
남도 유배길 사의재, 다산이 즐겨먹던 밥상 동문매반가
사의재는 특별히 볼 만한 게 있는 건 아니지만 이곳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교육과 연구에 몰두했던 창조와 희망의 공간이어서 역사적, 문화적 의미는 상당히 크다. 정약용이 강진에 처음 도착했던 날, 낯선 땅 강진에 와서 처음 묵은 곳이 바로 사의재이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으나 주막집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골방에 기거하며 몸과 마음을 다잡고 교육과 학문 연구에 집중하기로 다짐하며 붙인 이름이 '사의재'이다.
사의재란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 네 가지는 맑은 생각,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씨, 신중한 행동이다. 주막집 주인 할머니의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기르셔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얘기에 자신을 새로 추스른 다산이 1802년 10월경부터 최초 제자 황상을 시작으로 강진읍 여섯 제자에게 스스로 편찬한 '아학편'을 주교재로 교육을 베풀었으니 당대 최고 권위의 학당이 이곳에 창설된 셈이다.
한양 조정 권신사회의 잔혹함과 견딜 수 없는 기구함과 절망감으로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까지 했던 다산은 마침내 "내가 강진에 귀양 오기를 참 잘했다. 강진이 내 고향 땅 아니란 말 나는 믿지 않으리"라고 스스로 토로할 만큼 따뜻했던 강진지역의 인심에 마음과 몸을 열었다. 다산은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1801년 겨울부터 1805년 겨울까지 사의재에 머물렀다.
주막은 현재 동문매반가라는 식당으로 운영 중이다. 이곳에는 특별한 메뉴 '다산밥상'이 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다산 선생이 즐겨 드셨던 바지락전과 아욱된장국. 주인장 말씀으로는 매일 약주를 드셨을 다산에게 해장으로 아욱된장국, 안주로 바지락전이 그 당시엔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찬거리였을 거라고 한다. 다산을 생각하며 즐긴 한 끼 식사는 모든 반찬이 심심하고 참으로 맛있다.
사의재를 보았으니 저잣거리 구경에 나선다. 저잣거리에서는 매주 주말마다 마당극과 '조만간' 프로젝트 공연이 진행된다. 조만간은 '조선을 만난 시간' 프로젝트로 지역주민을 배우로 선발해 저잣거리 곳곳에서 조선시대 인물을 재현한 공연인데 단순한 관람 차원을 넘어서 관객들도 참여하는 공연이라 더욱 즐겁다. 공연은 10월 22일까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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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매반가
전남 강진군 강진읍 사의재길 27.
문의
061-434-9779.
강진다원과 백운차실
1982년 조성된 월출산 아래의 강진다원은 총 10여 만 평 규모이다. 월출산 밑으로 넓게 펼쳐진 차밭의 전경이 장관을 이룬다. 초록의 싱그러움과 월출산의 높이 솟아 오른 바위들이 참으로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강진의 다원을 보는 순간, 너무 아름다워서 무엇이라 설명하기 어렵다. 보성의 차밭이나 제주의 차밭과 다른 너무 색다른 모습이다. 가지런히 정갈하게 가꾸어진 차밭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강진다원은 큰 일교차와 강한 햇볕을 막아 주는 맑은 안개 등 명차 재배지의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다. 이곳에서 생산하는 차는 떫은맛이 적고 향이 좋다.
고려시대에는 월출산 야생 차나무 숲을 중심으로 차 문화가 꽃을 피웠다. 조선시대 들어오면서 고려의 차 문화는 쇠퇴했지만 이곳으로 유배 온 다산 정약용 선생에 의해 그 가치와 제다법이 재발견되며 부흥기를 맞이했다. 다산 정약용은 월출산에서 나오는 차가 천하에서 두 번째로 좋은 차라고 극찬했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제자들과 '다신계'를 맺었다. 이는 다산의 제다법으로 해마다 차를 만들어 보내기로 한 스승과 제자 간의 차로 맺은 약속이었다. 가장 어린 제자였던 이시헌 선생의 집안에서 다신계를 백년 넘게 지켰고, 자연스럽게 다산의 제다법이 계승되었는데, 그 후손이 바로 이한영 선생(1868~1956)이다. 그가 만들었던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를 계승해서 만들고 있는 곳이 '백운차실'이다.
백운차실에서는 월출산에서 딴 야생 찻잎으로 잎차와 떡차를 만든다. 이곳은 현대식 카페와 월출산을 바라보며 차를 마실 수 있는 운치 넘치는 한옥 공간이 있다. 백운차실을 방문할 예정이면 조금 여유 있게 시간을 내서 가면 좋다. 차는 천천히 우려내면서 마셔야 그 깊은 맛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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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차실
전남 강진군 성전면 백운로 107.
문의
0507-1345-4995.
월간산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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