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감상 돕고 탄소 배출량 줄이고…전시문화의 변화 시작됐다
‘쏴아쏴아’ ‘끼루룩끼루룩’
귀에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눈앞 스크린엔 기괴한 조형물이 바닷가를 배경으로 설치된 동영상 장면이 흘러간다. 바닷물 일렁거리는 제주 서귀포 노지 해변가의 현무암 갯바위. 그 위에 허연 흙으로 빚어 위태롭게 설치된 대도시 빌딩, 창고 등의 작은 조형물 여덟개. 이 광경을 배경으로 내레이션이 시작된다.
“검은 갯바위 주위로 맑고 투명한 바닷물이 일렁이고 햇살을 받은 건물 모형들은 눈이 시릴 정도로 하얗습니다. 밀물이 찾아온 시간, 갯바위 가장자리부터 물에 잠깁니다. 건물 모형들이 놓인 갯바위는 기술문명을 이룬 섬처럼 바닷물 위로 검은빛의 몸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갯바위 너머 수평선에서 파도가 끝없이 밀려옵니다. 가장자리에 놓여있던 건물 모형이 바닷물에 녹아 가장 먼저 하얗게 부서지기 시작합니다. 그 모형은 사라져 흔적조차 없습니다. 바닷물이 점점 차오르자 나머지 모형들도 하단부터 젖어들기 시작합니다. 모형의 하단은 파도에 부딪힐 때마다 조금씩 깎이고 녹습니다. 바닷물이 갯바위를 서서히 삼키고 있습니다. 하얗던 모형들은 바닷물에 젖어 표면에 얼룩이 번지기 시작하고 위태롭게 속살을 드러냅니다. 갯바위 꼭대기 위로 바닷물이 넘실댑니다…과학과 기술을 이용해 정교하게 층층이 쌓아 올린 모형들은 쉬지 않고 밀려오는 파도에 한순간 맥없이 부서져 수면 위로 나동그라집니다.…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대형 곡물창고마저 점점 기울어집니다. 갯바위의 꼭대기로 바닷물이 밀려오자 대형 곡물창고는 힘없이 옆으로 쓰러져 부서집니다. 모형들은 갯바위 표면에 하얗게 흔적으로만 남아있습니다. 갯바위는 이제 바다에 잠겨 검은 현무암의 꼭대기만 언뜻언뜻 드러납니다. 꼭대기엔 건축모형들이 있던 하얀 흔적이 반죽처럼 남아있지만 서서히 파도에 씻기고 녹아서 사라집니다.”
이 내레이션은 일차적으로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 관객들에게 작품의 내용을 일러줄 수 있는 감상체험을 안겨주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지난 9월1일부터 10일 사이 서울 평창동 토탈미술관에서 방자영, 이윤준 작가의 듀오그룹 방앤리가 펼친 전시회 ‘어둠 속의 예언자’의 출품작인 ‘액트제로 노지’에서 이 내레이션을 활용한 획기적인 전시체험 시도가 진행됐다.
지구의 기후위기를 은유하는 틀거지로 서귀포 노지 해변가에 3디프린터 조형물을 설치하고 이 작품들이 바다 물살에 휩쓸려 사라지는 디스토피아적 광경을 시청각적 장치를 통해 환기시켰다. 썰물의 물살에 잔해가 되어 휩쓸려가는 조형물의 처연한 모습은 내레이션을 하는 화자의 비장한 목소리를 통한 텍스트로 묘사되면서 다기한 감정을 일으키는 해석의 공명을 낳았다. 작가와 미술관 쪽은 “단지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동영상의 풍경 속 상황을 설명하는 차원을 넘어 볼 수 있는 일반 관객들도 청각적인 묘사를 접하면서 시각에 더한 새로운 감각적 체험을 이끌어내기 위한 목적도 담겨있었다”고 설명했다.
작가 듀오 방앤리의 토탈미술관 시청각 해설 전시는 장애인 관객과 일반 관객이 함께 누리는 전시장을 표방하는 최근 국내 미술관, 박물관의 공익적 변모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토탈미술관은 이에 더해 최근 실버세대 어르신들과 장애인들이 현대미술 작품들을 좀더 용이하게 관람하기 위한 관람 환경 리모델링 작업을 위해 가상환경의 브이알(VR) 체험 공간을 도입하기로 하고 수차례 전문가들과 관객을 초청한 워크숍을 열 예정이다.
국내에서 최고의 권위를 지닌 사립미술관인 삼성미술관 리움도 친환경, 사회적 책임으로 대표되는 ‘이에스지(ESG)’ 운영방안을 도입했다. 지난 5월 산하 호암미술관이 색맹 색약 관객을 위한 보정안경을 국내 미술관 최초로 비치해 이른바 ‘배리어 프리(Barrier Free)’로 불리는 친 장애인 관람 환경 조성을 조성한데 이어 리움미술관도 지난 10월부터 보정안경을 도입해 실행 중이다. 지난해엔 20여개 문화예술기관을 대상으로 기관 실무자 ESG포럼을 열어 주요 전시기관들의 이에스지 관련 정보와 탄소배출량 측정, 관리 노하우 등을 공유하는 방안 등을 논의한 바 있다.
지난 수십년간 별다른 제약 없이 국공립미술관에서 남발했던 전시폐기물 양산 관행에도 스스로 제동을 거는 흐름도 나타난다. ‘전시 가벽’을 없애거나 되풀이해 재활용하는 흐름이 단적인 사례다. 2021년 부산현대미술관이 ‘지속 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이란 기획전을 벌인 게 단초가 됐다. 당시 전시에서 미술관 쪽은 이전 전시에서 쓰다 버린 5톤 트럭 두대 분량의 막대한 폐기물들을 그대로 내놓고, 미술관 공간의 환경 친화성을 주된 화두로 내걸면서 조립식 벽에 작품 걸기, 이면지 활용 홍보물 등을 고안해 내놓는 등의 기획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 이런 흐름은 다른 지자체 미술관은 물론 국립현대미술관과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등으로 확산돼 가벽을 최소화하고 재활용 가능한 목조 모듈 벽체 도입 등이 활성화되는 추세로 이어졌다. 대형 기획전을 통해 발생하는 폐기물이 수톤 단위에 이를 정도로 내부 관계자들 사이에서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던 터여서 소수자의 접근성 문제와 더불어 전시 기획과 시설의 친환경화 트렌드는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미술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입지를 갖고있는 전시기관들이 공익적 변모를 최근 내걸고 나온 배경에는 기후변화와 온난화 등 전 지구적 위기상황에서 전시장 환경 또한 시대적 상황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점과 소수자를 포함한 전체 대중을 위한 문화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시대적 상황을 꼽을 수 있다. 이런 식의 공공미술관 전시 혁신 없이는 전시 콘텐츠를 좌우하는 미술시장에 압도당해 끌려만 다닐 것이란 위기의식도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2021년 ‘지속가능한 미술관’ 전을 기획했던 김성연 전 부산현대미술관장은 “미술관의 건립과 공간 설계 과정에서 장기적인 전망과 충분한 재원 확보를 전제로 다중에게 열린 개방적 얼개와 생태 친화적인 전시 관람 모델을 고민하고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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