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예산까지 정쟁의 늪에 빠졌다
더불어민주당이 14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예산소위에서 소관 부처 예산안을 단독 의결했다. 윤석열 정부가 추진한 글로벌 선도 연구센터 지원, 글로벌 기초 연구실, 글로벌 연구·개발(R&D) 등을 합쳐 약 1조1600억원가량을 삭감하고, 연구원 운영비 지원과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포함한 4대 과기원 학생 인건비 등을 합해 2조원가량 증액한 것이다. 민주당은 “윤석열표 R&D 삭감을 되돌렸다”고 했고, 국민의힘은 “국정 과제 예산에 대한 ‘묻지 마식 칼질’이다”라고 했다.
그동안 정쟁의 무풍 지대에 있었던 R&D 예산이 정쟁의 한가운데에 섰다. 검찰 등 권력기관의 특수활동비나 대통령표 예산을 두고 싸우는 일은 비일비재했지만, R&D 예산이 정쟁 거리가 된 건 이례적이다. 2000년대 초부터 예산 업무를 맡은 한 관료는 “이 예산은 정치를 탄 적이 없는데, 국회에서 논란이 된 건 사상 최초”라며 “연구·개발 예산이 정쟁화된 것은 국가적으로도 불행한 일”이라고 했다.
R&D 예산 논란은 윤 대통령이 연구 성과와 상관없이 연구비를 나눠 가지는 이른바 ‘과학계 카르텔’을 거론하면서 불거졌다. 예산 당국은 내년 R&D 예산을 올해보다 16.7% 줄였다. 그러나 젊은 과학자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야당이 ‘R&D 예산 복원’으로 치고 들어왔다.
이날 민주당이 증액한 예산은 주로 연구원들의 인건비와 관련된 예산들이었다. 그러면서 연구실 같은 설비를 늘리는 예산은 깎았다. 당장 눈에 보이는 예산 위주로 증액한 것이다. 15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대전 대덕특구를 찾아 “R&D 예산 복원은 당력을 총동원해서 반드시 하겠다”고 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여당 또한 젊은 연구원들을 만나 간담회를 가졌다. 유의동 정책위의장은 “애초 정부의 취지도 비효율적 예산 집행을 줄여서 창의적 연구를 하는 연구자들에게 더 많은 투자를 하자는 의도”라고 했다.
여야의 이러한 행보는 장기적으로 다뤄야 할 예산을 당장의 정치적 이해를 위해서만 활용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R&D 예산 논의가 국가 경쟁력 차원보다는 젊은 연구원들 표심 경쟁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박노욱 조세재정연구원 선임연구원은 “R&D 예산 내용을 보면 사실은 정치적인 내용이 아니지만, 대통령이 이를 카르텔 타파와 연결시키자 야당이 거꾸로 역공을 펼친 것”이라며 “여야의 예산 심의가 사업의 타당성을 두고 벌어지는 게 아니라, 정치적 어젠다를 선점하기 위한 투쟁으로 흐르고 있다”고 했다. 50년 전인 1973년 대덕연구단지(현 대덕특구) 조성을 시작했던 것과 비교하면 ‘백년지대계’를 수립하는 국가적 역량은 퇴보했다는 것이다.
이런 ‘예산의 정치화’는 해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국회 예산정책처장을 지낸 김준기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과거 지역구 예산만 신경 쓸 때보다는 의회정치가 진전됐다고 볼 수는 있지만 예산안을 심사하는 내용을 보면 (나아진 건지) 의문이다”라며 “이들이 열심히 (예산을 심의하는 게) 진짜 국가를 돕는 건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정치와 관련 없는 사업들이 갑자기 이슈를 타면서 ‘쟁점 예산’이 돼버리는 일이 반복된다면, 먼 미래까지 내다보고 예산을 짜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특히 여소야대인 21대 국회에서는 예산의 정치화가 과거와 다른 패턴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과거 예산의 정치화라는 건 예산 당국이 집권 여당의 노선을 그대로 추종하는 걸 말했다”며 “현재는 어떤 이슈가 터지면 그와 관계된 예산을 야당이 문제 삼는 식으로 패턴이 다소 변화한 것 같다”고 했다.
가령 지난 문재인 정부 때는 예산 당국이 ‘소득 주도 성장’ 예산을 국회에 들고 와 여야가 첨예하게 대치했다면, 최근에는 대통령실 용산 이전 등 이슈가 발생하면 이를 빌미로 예산을 놓고 다툰다는 것이다. 정권 교체기와 맞물려 있다는 분석도 있다. 예산 당국 관계자는 “정권이 바뀌면 전 정부 사업 예산은 줄이고, 현 정부 사업 예산은 늘리는 걸 반복해 왔다”며 “이런 등락은 계속 있었지만 이번은 여소야대 국회라 충돌이 더 심한 거 같다”고 했다.
예산 당국의 힘이 점차 빠지면서 브레이크 역할을 할 존재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한 국회 수석전문위원은 “과거에는 예산 당국이 예산안 편성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논란이 될 문제를 미리 거르거나, 국회 예산 심사 단계에서도 정치권의 압력에 맞설 수 있는 ‘대항력’이 있었다”며 “행정부에 대한 국회의 우위가 점차 강해지면서 정치의 입김이 그대로 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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