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29년 恨 풀어준 염경엽 “실패를 겁내지 않는 팀 만들고 떠나겠다”
15일 서울 잠실야구장 LG 트윈스 감독실에는 난(蘭)과 화환이 가득했다. 29년 만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축하하는 선물이었다. 승장(勝將)인 염경엽(55) LG 감독은 구단 직원들과 다음 시즌을 어떻게 준비할지 논의하고 있었다. 그는 “어제 하루 푹 쉬고 바로 출근했다. 긴장감이 풀리니 몸이 늘어지고 공허한 마음이 들더라”고 말했다.
이번 우승은 그로서도 의미가 다르다. 감독으로 이룬 첫 우승이기 때문이다. 선수와 단장으론 우승을 경험했고, 넥센과 SK 감독 시절 명장으로 통했지만 우승과는 운이 닿지 않았다. 염 감독은 “(이번 우승은) 간절함이 모여 이룬 결과”라며 “구단주부터 단장, 선수단, 팬들이 우승을 간절히 원했고 나도 감독으로 우승이 절실했다”고 말했다.
정규 시즌을 1위로 마치고 한국시리즈 우승에 유리한 고지에 올랐지만 돌발 변수가 터졌다. 선발 투수진 주축 중 하나인 외국인 선수 아담 플럿코가 부상 후 복귀 시기를 놓고 이견을 보이다 쫓겨난 것. 결과적으로 선발진 무게가 상대 KT보다 뒤처진다는 평가가 많았다. 염 감독이 너무 감정적으로 이 문제를 처리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그러나 염 감독은 “사정도 해보고 압박도 해봤는데 결국 안 됐다”면서 “정규 시즌이 끝나기 전에 확실히 정리를 해야 선수단에 타격이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고 말했다.
불안한 가운데 한국시리즈를 맞았지만 에이스 투수 켈리와 함께 김윤식이 깜짝 활약을 해주고, 다른 중간 계투 투수들이 투혼을 발휘하면서 우승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는 “2차전 박동원이 역전 홈런을 때려 이겼을 때 우승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 홈런이 없었다면 2차전을 내주고 무기력하게 무너졌을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박동원은 3-4로 뒤지던 2차전 8회말 역전 2점 홈런을 때렸다.
우승이 거의 확정적인 5차전 9회초 수비 때 염 감독은 마무리 투수 고우석을 마운드에 올렸다. 한국시리즈에서 두 차례 블론세이브에 3경기 평균자책점 10.80으로 부진했던 고우석이지만 신뢰를 거두지 않았다. 고우석은 이 순간만큼은 깔끔한 삼자 범퇴로 믿음에 화답했다. 염 감독은 “아무리 (잠시) 부진해도 고우석은 최고의 마무리 투수다. 올해뿐 아니라 최소 10년은 LG 마무리를 해야 할 선수”라면서 힘을 실어줬다.
지난해 LG는 2위를 하고도 한국시리즈에 오르지 못했다. 구단은 2위라는 호성적을 올린 감독을 내보내고 염 감독을 세웠다. 그는 “운이 좋은 감독”이라면서 “이미 전력도 탄탄하고, 모기업의 지원도 풍부했다.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잘 얹으면 됐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다면 무엇을 보탠 것일까. 염 감독은 “두려움과 망설임을 이 팀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며 “선수들에게 과감하게 치고, 던지고, 뛰라고 주문했다. 실패를 감수하면서 도루와 번트 등 작전 지시를 많이 한 것도 이를 위해서였다”고 했다. 그는 “5월쯤 되니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뛰더라”고 덧붙였다.
염 감독에겐 선수 은퇴 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작성한 ‘리더십 철학 노트’가 있다. 200자 원고지 41장이 넘는 분량. 경기가 없는 월요일마다 이 노트를 정독하며 한 주간 리더십을 성찰한다고 한다. 그중 가장 강조하는 지점은 ‘뚜렷한 계획과 방향’. 아무리 훈련을 열심히 해도 무엇을 위해 하는지 명확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 그는 “부임하자마자 한 일이 선수 개개인마다 계획과 방향을 설정해준 것”이었다고 말했다.
선수와 단장, 감독으로 모두 우승을 이룬 염 감독 다음 목표는 뭘까. “LG가 명문 구단이 될 수 있는 틀을 만드는 것”이다. 감독과 단장이 바뀌었다고 팀이 싹 바뀌는 게 아니라, 누가 오든 지속 가능한 체계를 만드는 것. 언젠가 후임으로 올 감독도 지금 코치들 중에서 뽑아 이 기반을 이어가고 싶다는 바람이다.
“리더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떠날 때 나온다고 생각해요. 이 사람이 조직에 과연 도움이 됐는지 안 됐는지는 그 걸 보면 아는 거죠. 훗날 팀을 떠날 때 ‘LG에 큰 도움을 준 감독’이란 말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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