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플라자] B면의 삶

강민지 ‘따님이 기가 세요’ 저자 2023. 11. 16.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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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DB

보통의 삶은 지극히 따분하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잠을 깨우고 버스나 지하철에 몸을 싣고 하루의 대부분을 일터에서 보낸다. 해가 다 지고 나서 귀가하면 얼른 씻고 일찍 잠들어 내일 아침을 덜 피곤하게 만들면 좋겠지만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내 시간 하나 없이 지나간 하루를 보상받고 싶은 마음에 억지로 휴대폰을 집어 든다. 눈은 화면에 고정되어 있지만 머리로는 다른 생각들이 밀려온다. 억지로 버티다 결국 휴대폰이 얼굴에 떨어지고 나서야 잠에 들 준비를 한다. 만족과는 별개로 삶은 계속된다. 그러다가도 문득 어느 날, 매일 똑같은 일상에 위기감이 든다. 언제까지 반복해야 할까. 보통의 사람들은 이럴 때 무엇을 떠올릴까. 술? 담배? 아니면 그보다 더한 것?

나는 다행히 운동을 떠올렸다. 운동을 시작하게 된 별다른 계기는 없었다. 운동을 시작하기 전 내 일상을 되돌아보자면 퇴근 후 맥주 한 캔 하는 것 말고는 달리 취미가 없었다. 주말에도 혼자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보니 그 시간을 때우려 마시기 시작한 맥주였는데, 그것도 습관이 되어 차차 지루해진 참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너무 심심했다.

오죽했으면 퇴근길에 평소처럼 버스를 타지 않고 집까지 5km가 넘는 길을 그냥 냅다 뛰어가기까지 했을까.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입고 있던 옷, 신발은 물론 거추장스러운 가방까지 메고 준비운동도 하지 않은 채 달렸다. 운동이라고는 남 일이라 여기고 살았으니 몇 발짝만 뛰어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는 내내 웃고 있었다. 숨이 막혀 심장까지 아플 정도로 뛰어도, 땀에 젖어 축축해진 옷을 입고도 썩 괜찮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내 발로 뛰어서 집에 오다니. 그때 들었던 묘한 정복감을 기억한다. 그 이후 곧바로 내내 달릴 수 있는 축구(풋살)를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더 이상 내 삶에서 축구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정도가 되었다. 사실 나는 내가 축구에 빠져든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다.

축구는 나에게 계속해서 미션을 준다. 난생처음 해본 패스나 드리블 같은 기술이나 훈련 때마다 하는 미니 게임, 생전 모르는 사람들과 치르는 친선전. 최근엔 아마추어 풋살 대회까지. 아직까지도 실력은 엉망진창이지만 분명히 어제보단 분명히 나아지고 있는 나를 매일같이 느낄 수 있다.

게다가, 좀 못해도 괜찮다. 내가 공을 잘 차던, 못 차던 내 생업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 내가 동네 축구에서 손흥민이라 불리며 공을 기가 막히게 차도, 반대로 주위에서 개발이라고 놀려대며 조롱을 받더라도 내 돈벌이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는 이야기다. 일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과, 모든 걸 잠시 까먹고 땀 흘리며 뛰다 보니 의도치 않게 일과 일상의 ON & OFF 스위치를 달게 된 셈이다.

한때는 일에서 성취를 얻으려 고군분투했다. 조금 더 돈을 많이 벌어보려, 조금 더 사회에서 인정받으려, 퇴근해도 머릿속은 퇴근하지 못한 채 일과 일상을 딱히 구분하지 않았다. 그렇게 집착하며 더 오래 일하고 더 많이 일을 해대도 내가 바라는 만큼의 보상은 따라오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지만, 그때는 내가 이뤄낸 일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며 자괴감에 빠지기 일쑤였다.

축구 덕분에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일에서만 성취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나한테는 일과 무관하게 흘러가는 삶이 있다. 그 자체로 나는 괜찮아진다. 어릴 적 음악을 듣던 카세트 테이프가 생각난다. 양면에 다른 음악이 들어있어 A면, B면을 번갈아 듣던. 연예인들의 ‘부캐’처럼 우리 모두에게 테이프의 ‘B면’이 있다면 어떨까. A면 테이프가 늘어나 지직거려도 거뜬히 버텨줄 B면이 있다면 사람은 그걸로도 살 수 있다.

여전히 삶은 지극히 따분하다. 그럼에도 괜찮다고 느껴지는 건 B면의 삶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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