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사라진 낙동강 뱃길
영남 공동체 일군 장본인, 더듬어 보면 뱃길 보일 듯
류승훈 부산근현대역사관 운영팀장
부산 사하구 아미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낙동강 풍경은 다대 8경 중 하나이다. 이곳에서는 노을이 붉게 물든 다대포를 감상하거나 저녁 하늘에 걸린 반달이 하구에 풍덩 빠진 장관을 볼 수 있다. 이 아름다운 경치는 낙동강과 남해가 만나는 기수역이 연출한 것이다. 낙동강과 남해가 만나는 영원의 경계를 살펴보는 내 마음은 마치 생멸의 미학을 관조하는 것처럼 진중해진다. 그런데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이곳에서도 부표같이 불쑥 떠오르는 안타까움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 이유는 수상교통의 출발점이었던 낙동강 하구, 황포돛배가 줄지어 소강(溯江)하는 장관이 강물 속 깊이 잠겼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교통로로서 낙동강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다.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낙동강은 훌륭한 뱃길이었다. 낙동강은 경상도를 굽이굽이 흘러가면서 숱한 하천과 합쳐졌다. 낙동강을 본류로 하여 지류들이 합류하면서 영남의 물길이 전체적으로 통하였으니 지금의 경부선이나 경부고속도로와 다를 바 없는 교통로였다.
철도와 자동차가 없었던 전근대 사회에서 제일 중요한 교통수단은 선박이었다. 창녕 비봉리에서 선사시대의 배(船)가 발굴된 것으로 보건대 일찌감치 낙동강은 생업활동의 최전선이자 영남의 곳곳을 오가는 주요 교통로로 활용되었음이 틀림없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는 ‘북학의(北學議)’에서 “상품 운송에서 백 대의 수레로 운반하는 것은 한 척의 선박으로 운반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며, 육지로 천 리를 가는 것보다 배로 만 리를 운항하는 것이 훨씬 편리하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상품을 운송할 때 백 대의 수레가 한 척의 배보다 못하다는 뜻이다.
낙동강이 국가 물류와 상품 운송의 대동맥으로 부상한 때는 고려시대였다. 고려시대부터 세곡(稅穀·세금으로 내는 곡식)을 운반하는 조운(漕運)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곡식은 무게와 부피가 크기 때문에 이를 모아 서울까지 보내는 것이 꼭 해결되어야 할 과제였다. 수천 섬의 곡식은 사람이나 동물이 나를 수 있는 규모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 큰 배로 강과 바다를 통해 운반했다. 인구와 세곡이 많았던 영남지역에서는 당연히 낙동강이 중요한 운송로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낙동강은 조일 무역의 핵심 루트였다. 왜인들은 낙동강을 통해 서울로 상경했으며, 무역품을 운송할 수 있었다. 왜인들이 부산포에 입항할 때나 사절단들이 상경할 때도 엄청난 양의 무역품을 가지고 왔다. 조선 전기의 왜인들은 동 납 철 등 금속제품을 무역하기 위해서 가져왔다. 조선 정부는 무역품의 중량을 고려하여 낙동강의 수로를 이용하고자 했다. 대일 무역으로 인하여 낙동강의 이용도가 점차 높아지자 여러 포구에는 무역 활동에 필요한 시설들이 세워졌다. 이 와중에 발전한 곳이 지금의 북구 금곡동에 있었던 동원진(東院津)이었다. 세조는 동원진에 수상 교통시설인 수참(水站)을 별도로 설치하도록 했다. 이때부터 동원진은 왜인의 출입이 잦아지고 무역품이 자주 거래되는 대일관계의 요지로 성장했다.
낙동강을 통해서 가장 많이 운송된 상품은 단연 ‘소금’이었다. 1900년 당시 낙동강 중하류 지역에서 운항하는 소금배가 약 400척이었다. 소금 수요가 많았던 봄가을에는 수백 척의 소금배가 낙동강을 통해 거슬러 올라가는 진풍경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하단에서 먼저 출발한 낙동강 소금배는 밀양 대구 상주까지 올라갔으며, 간혹 멀고도 먼 안동까지 도착한 사례도 있었다. 소금배가 낙동강 하구에서 출발하는 이유는 ‘명지 염전’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영남 지역에서 제일 유명했던 명지 염전의 소금은 경상도 밥상과 영남 사람의 입맛을 좌우하곤 했다. 낙동강 하구의 소금배는 소금 외에도 젓갈과 어류 등 다양한 제품을 싣고 출발했다. 소금배가 내려올 때는 내륙에서 생산되는 곡물과 채소를 가져와 낙동강 하류 지역에서 되팔았다. 낙동강 소금배는 영남 해안가와 내륙의 상품을 유통시키는 교역선 역할을 했다.
이처럼 영남의 모든 물길이 낙동강으로 통했던 시절이 있었다. 낙동강 뱃길은 아쉽게도 1950년대 이후로 자취를 감추었다. 길이 끊어지고 깊은 어둠이 몰려오지만 잘 찾아보면 기억의 길은 희미하게 남아있는 법이다. 아미산에서 본 낙동강 하구는 어김없이 붉은 해를 삼키며 검게 사라져 가도 여전히 수면 아래로 흩어지지 않은 모래섬만큼은 사라진 뱃길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사라진 교통의 기억을 따라 낙동강을 더듬어 가면 그 끝에는 뱃길이 있을 것이며, 다시 뱃길을 따라 출렁이고 몸부림을 치다 종착역에 도착해 보면 사람과 문화, 역사가 어룽거릴 수도 있다. 사람과 역사, 장소와 문화를 이어준 낙동강 뱃길은 곧 영남 공동체의 역사를 탄생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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