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은 최고의 적… 라커룸 통로에 문구 붙여 매일 새겼다”

이헌재 기자 2023. 11. 1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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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년만에 ‘통합우승’ 일군 프로야구 LG 염경엽 감독 인터뷰
“부임전 LG, 한번 무너지면 끝장… 두려움 없애야 우승할수 있다 생각
뛰는 야구-공격적 팀 컬러에 집중… 두차례 실패 경험삼아 만반의 준비
승운까지 따라줘 팬들에 우승 선물”
염 감독의 요청으로 구단이 잠실구장 내에 붙인 문구.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두려움과 망설임은 나의 최고의 적이다!’

서울 잠실야구장 내 LG 선수단 라커룸으로 이어지는 통로엔 이런 문구가 붙어 있다. 지난해 11월 LG 지휘봉을 잡은 염경엽 감독(55)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선수들은 라커룸을 드나들 때마다 이 문구를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겼다.

올 시즌 LG 선수들은 두려움이 없이 그라운드를 누볐다. 그리고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했다. KT와의 한국시리즈에서도 망설임이 없었다. 1차전에서 패했지만 2∼5차전을 내리 따내며 1994년 이후 29년 만에 통합우승을 일궜다. 15일 잠실구장에서 만난 염 감독은 “작년까지의 LG는 위기에서 무너지고, 한 번 무너지면 일어서지 못하는 팀이었다. 두려움을 없애야 우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LG를 29년 만에 한국시리즈 정상으로 이끈 염경엽 감독이 15일 본보와 인터뷰에 앞서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카메라 앞에 섰다. 선수로 두 번, 프런트 직원으로 두 번, 단장으로 한 번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본 염 감독은 사령탑으로도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췄다. 그는 “감독으로 처음 경험한 올해 우승이 가장 기쁘다”고 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염 감독은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방편 중 하나로 ‘뛰는 야구’를 선수들에게 주문했다. 죽더라도 공격적으로 뛰다 죽으라는 것이었다. LG는 정규시즌에서 도루 166개를 기록했다. 10개 구단 중 1위였다. 도루 실패 역시 101차례로 제일 많았다. 도루 성공률이 62.2%밖에 되지 않자 구단 안팎에선 “뻔히 보이는 작전이 작전이냐”며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염 감독은 개의치 않았다고 했다. 그는 “팬들과 언론은 도루 실패 숫자를 봤겠지만 내가 집중한 건 공격적인 팀 컬러를 만드는 것이었다. 도루 자체의 효과보다는 뛰는 야구를 통해 선수들이 더 단단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 LG 선수들의 플레이는 과감해졌다. 지고 있어도 질 것 같지 않았다. 올해 LG는 정규시즌에서 86승(2무 56패)을 거뒀는데 이 중 42번이 역전승이었다. 염 감독은 “성적이 나면서 거꾸로 선수들이 내게 자신감을 심어줬다. 그렇게 LG라는 팀은 위기 속에 더욱 강해졌다”고 했다.

올해 한국시리즈의 향방을 가른 건 10일 3차전이었다. 두 팀이 1승 1패를 주고받은 뒤 열린 3차전에서 LG는 8회말 KT 박병호에게 홈런을 얻어맞으며 5-7로 역전을 당했다. 염 감독은 “분위기가 넘어갔다. 예전의 LG라면 거기서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선수들은 정규시즌에서 더 큰 점수 차이도 역전한 경험이 있었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먼저 ‘뒤집을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고 했다.

그리고 9회초 2사 후 드라마 같은 오지환의 재역전 3점 홈런이 터졌다. 염 감독은 “KT 마무리 투수 김재윤의 실투가 나왔다. 그걸 오지환이 놓치지 않고 홈런으로 만들어 내더라. 그 순간 ‘우주의 기운’이 우리 쪽으로 향하고 있구나 하고 느꼈다”고 했다.

8일 2차전도 극적이긴 마찬가지였다. LG는 선발 투수 최원태의 난조 속에 1회에만 4점을 내줬다. 하지만 이후 7명의 구원 투수들이 8과 3분의 2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았고 타선도 힘을 내 결국 5-4로 승부를 뒤집었다. LG 선수단에 새겨진 ‘역전 DNA’가 드러난 한국시리즈였다.

그동안 염 감독은 성공보다는 실패가 익숙한 지도자였다. 2014년 넥센을 이끌고 한국시리즈에 나선 염 감독은 삼성에 2승 4패로 무릎을 꿇은 뒤 눈물을 펑펑 쏟았다. SK(현 SSG) 사령탑이던 2019년엔 정규시즌 내내 1위를 달리다 두산에 막판 역전을 허용했다. 플레이오프로 밀려난 SK는 키움에 3연패를 당하며 일찌감치 짐을 싸야 했다.

염 감독은 “2014년엔 겁 없이 야구를 했지만 객관적인 전력 차이까지는 극복하지 못했다. 2019년엔 정규시즌에서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했다”며 “지난 두 번의 실패를 경험 삼아 올해는 투수 필승조를 다양화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승운까지 따라 줘 오래 기다려주신 팬들께 우승을 선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우승이 확정된 순간 염 감독은 선수들과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염 감독은 우승한 다음 날인 14일 포수 박동원과 투수 유영찬에게 사비로 각각 1000만 원을 직접 송금했다.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와는 별도로 수훈 선수에게 상금 1000만 원을 주기로 약속했었는데 수훈 선수가 2명이 되면서 2000만 원을 내놨다. 그는 “시즌 내내 잘 따라준 선수들에게 어떻게 고마움을 표시할까 고민하다가 상금을 주기로 했던 것”이라며 “우승만 한다면 돈이야 얼마든지 써도 아깝지 않다”며 웃었다.

최강의 전력에 자신감과 경험까지 붙은 LG는 앞으로 언제든 우승할 수 있는 팀으로 평가받는다. 올해가 ‘LG 왕조’의 원년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염 감독은 “우리 팀은 구광모 구단주님부터 프런트 직원, 선수들까지 모든 구성원이 같은 목표를 향해 ‘원팀’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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