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아영의 레인보] 형, 미스터 린턴 그리고 놈놈놈
원래는 이 정부의 굳건한 남성연대에 대해 쓰려고 했다. 우격다짐으로 방송을 장악하는 모양새 뒤에 숨어 있는 남성연대 그리고 그에 맞서 신당을 만들겠다는 또 다른 남성의 언어는 다른 측면에서 더욱 문제적이라고 쓰려고 했다. 시작은 박민 KBS 사장 당시 후보자의 지난 7일 국회 인사청문회였다. KBS 사장 자리를 제안한 인물이 이 위원장 아니냐는 질문에 박 후보자는 사실이 아니라고 했지만 ‘사석에서 어떻게 부르느냐’는 질문에 “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했다.
“왜 자꾸 서로 형이라 호칭하는지 모르겠어요.” 한 여성 취재원은 팀장을 ‘형’이라 칭하는 남성 동료들 앞에서 곤혹스럽다고 했다. 자신이 참석하지 못한 회식 자리에서 팀장과 동료들이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려 당혹스러운 경우도 있었다. 같이 밥 먹고 술 먹으며 일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굳건한 연대,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고 ‘형’이라는 호칭으로 대동단결하는 남성들의 네트워크에서 여성들은 겉돌거나 배제된다. 이동관 위원장만 ‘형’이었을까. 이 위원장의 서울대 정치학과 후배인 박 사장은 윤석열 대통령이 검찰총장이던 2019년 법조언론인클럽 회장을 지냈다. 인사청문회 자리에서 ‘형’이라는 호칭을 꺼낼 수 있는 무감함은 거기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 정부에서 이어져온 굳건한 ‘남성연대’의 한 조각을 또 보여준 셈이다. 이 때문에 그가 사장직에 앉자마자 ‘지상파 최초의 간판뉴스 여성 메인 앵커’부터 교체한 것은 우연으로 보기 힘들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는 윤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집권 세력에 ‘대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권력의 남성연대를 넘어서기는커녕 ‘혐오에 기반한 갈라치기 언어’를 지속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선 더 큰 문제로 보인다. 그가 집권 세력의 대체재로서 생산적 의제를 보여준 적이 없다는 점과 별개로 그의 언어가 혐오를 조장한다는 점에서 그의 한계는 뚜렷하다. 이 전 대표는 부산 토크콘서트에 찾아온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에게 굳이 ‘미스터 린턴’이라고 불렀다.
인 위원장은 한국 국적자이고 백인에 주류 남성이지만 한편으론 복수국적을 가진 ‘외국인’이며 정치적으로도 국외자다. 지난 대선 국면부터 여성들의 목소리에 제대로 귀 기울인 적, 장애인 이동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 없으면서, 오해하고 미워하고, ‘문제는 그들’이라고 갈라치는 모습을 지켜봐온 연장선에서 이것이 혐오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전 대표는 정치는 인터넷 세상과 달리 ‘어그로’를 끄는 것이 아니고 정치인의 언어는 악의적인 갈라치기 언어와는 달라야 한다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아무리 정치가 표 대결이고, 내 편을 모으는 게 중요하다지만 갈라치기에도 정도가 있다.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어린놈’ 발언도 그렇다. 그가 자신의 출판기념회에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에 대해 “건방진 놈” “어린놈”이라고 발언하자 객석에서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 어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건방지고 어린 놈’이라는 이유도 한심하지만 한국 정치, 아니 사회 전체가 혐오를 유발하는 막말에 취해 있는 것 같아 두렵다. 정치인들이 ‘형’이라며 내 편 만들고 ‘이쪽’은 안 된다며 갈라치고 ‘적’을 상정해 깔아뭉개는 동안 대다수 시민은 소외된다. 제일 걱정스러운 것은 양당의 이런 정치가 지속되면서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가 선을 넘는 수준에 와 있다는 점이다. 20대 남성이 편의점 여성 아르바이트생의 머리카락 길이가 짧다는 이유로 폭행한 사건은 정치가 혐오를 이용하면서 혐오가 강화돼 벌어진 일이지, 한 남성의 개별 사건이 아니다.
좋은 정치는 갈라치기와 혐오를 줄여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2019년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대만 민주진보당의 판윈 의원을 지난 9월 인터뷰했다. 궁금했다. 대만도 혐오를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을 텐데 어떻게 집권 세력이 어려운 정치적 결정을 내렸을까. 판윈 의원은 2019년 법안 통과 전후에 많은 민진당 의원이 자신의 선거구에서 보이콧에 직면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의원들은 거짓되고 혐오스러운 메시지를 막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거대 양당에는 거짓되고 혐오스러운 메시지를 막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는 정치인이 있는가.
모두를 비판하는 칼럼은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거대 양당 정치인들의 막말에 처음 생각했던 글은 길을 잃었다. “막말이 정치를 혐오하게 한다”는 한 줄의 사실은 너무 힘이 없지만 그럼에도 지금 한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실이기에 쓰기로 했다. 대신 가장 절망적인 사실이라고 덧붙이겠다.
임아영 젠더데스크·플랫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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