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영웅은 없다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 가끔 유튜브 문화유산채널의 K-ASMR 국가무형문화재 시리즈를 찾아서 본다. 그렇게 찾은 동영상 중 하나가 명주짜기였다. 베틀에서 달가닥달가닥 명주 짜는 소리를 기대하며 튼 동영상은 바로 내 예상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베틀에 앉아 천을 짜는 첫 화면은 맛보기였을 뿐이고, 본격적인 내용은 누에를 기르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자연 다큐멘터리처럼 뽕잎을 먹으며 누에가 성장해 고치를 짓는 장면부터 시작하더니, 인간의 온갖 작업이 이어졌다. 여럿이 모여 고치를 다듬고는 삶아서 실을 뽑아 물레에 걸어 실뭉치를 만든다. 그 후엔 서로 붙은 실을 분리하는 실째기 작업이 이어진다. 째기를 마친 실은 걸어서 말리고 가닥별로 실뭉치를 만든다. 아직도 끝이 아니다! 한 필의 길이로 실의 길이를 맞추는 베날기 작업, 그다음엔 그 실을 펼쳐 풀을 먹이고 말리는 베메기 작업이 이어진다. 베메기 작업을 하려면 한 필 길이의 실을 늘어놓을 넓은 공간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여럿이 달라붙어 일일이 솔로 풀을 먹여야 한다.
다른 무형문화재와 달리 명주짜기는 보유자 없는 보유단체가 전승하고 있었는데, 작업 과정을 보니 십분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누에 키우기는 물론이요, 그 중간 과정 모두가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작업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사전 작업을 보노라니 마지막 베틀 작업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동영상을 보다가 퍼뜩 <고려사>의 한 기록이 생각났다. 충렬왕에게 시집온 몽골 출신 제국대장공주는 고려의 어떤 비구니가 바친, 매미 날개처럼 얇은 꽃무늬 베를 보고는 감탄했다. 비결을 궁금해한 공주에게 비구니는 이런 천을 짤 수 있는 계집종이 있다고 답을 했고 결국 그 계집종을 바칠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이다.
그 짧은 기록이 예전에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하늘하늘한 베를 짜는 건 한 명의 특별한 기술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그만큼 가는 실을 뽑아 베를 짤 수 있을 정도로 처리하는 것은 혼자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그렇게 가늘게 쪼개지면서도 튼튼한 실을 내는 재료 역시 아무 데서 아무렇게나 자랄 리가 없다. 아마도 그 매미 날개 같은 베는 그 비구니로 대표된 절에서 거느리고 있던 여성 수공업 집단에서 생산했을 것이며, 그 베의 재료 역시 절에서 관리하며 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구니는 왜 계집종 한 명이 그런 기술을 가졌다는 정도로 얘기했을까. 베짜는 과정을 일일이 설명하는 게 복잡하기도 했겠지만, 안 그랬다면 절 전체가 착취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사료를 되씹어 보면서 우리가 사람 사는 방식을 오해하기 쉽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우리는 자꾸 어떤 특별한 한 사람이 고립적이며 단독으로 무언가 대단한 비결이나 기술을 가지고 큰 성취를 해낼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과학혁명, 산업혁명이 천재 과학자나 발명가가 혁신해낸 이야기로 그려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 보니 ‘여기 현재’의 ‘지금 현실’에서도 그러한 상위 1%의 영재나 영웅을 끊임없이 찾아다니고, 그들에게 ‘몰빵’을 해주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심각한 오류다. 근래의 수많은 관련 연구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세상은 그런 식으로 변화해오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변화해온 것처럼 인간이 생각하고 싶어했을 뿐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삶의 그 어떤 단락도 타인의 도움 없이 단독으로, 고립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두 명의 영웅이 세상을 바꾼 적도 없고 바꾸지도 못한다. 그렇게 착각하는 사람이 많을 때 인류는 불행했다. 아니, 불행하기 때문에 자꾸 그런 착각의 유혹에 빠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유혹이 너무 넘실거리는 시대다.
장지연 대전대 혜화리버럴아츠칼리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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