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경의 한뼘 양생]상옥과 채영을 응원하며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을 보았다. 섭식장애를 겪는 딸 채영과 그 엄마 상옥의 이야기이다. 첫 장면의 채영은 자신이 잘한 일을 칭찬해보라는 상담사의 말에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이어 상옥의 등장. 흰머리가 섞인 부스스한 단발, 주름이 깊이 팬 얼굴, 슬픈 눈의 그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 엄마를 이해하지만 용서할 수는 없다는 채영을 끌어안고 상옥은 “아프지만 마”라고 되뇌며 흐느낀다. 나는 명치끝이 아려온다.
상옥은 소위 386이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소련의 멸망과 더불어 운동권이 흩어졌을 때, 가진 것 없는 싱글맘 상옥은 밥벌이에 나서야 했다. 삶의 전망 없이 과외로 근근이 생계를 꾸리는 일상은 지리멸렬했다. 상옥은 30만원 남짓한 전 재산과 단출한 살림살이를 빨간 ‘마티즈’에 싣고, 아홉 살 채영이와 함께 무주에 있는 대안학교로 향한다. 월급 50만원의 기숙사 사감으로 취직한 것이다. 다행히 그곳의 상처 많은 청소년을 돌보는 일에서 그는 삶의 열정을 다시 찾는다. 대신 채영은 조용히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돌봄을 받지 못하고 큰 것은 상옥도 마찬가지였다. 시골 가난한 집의 다섯째. 초등학생 시절 부모와 언니들은 서울로 돈 벌러 갔다. “술에 취해 낫을 들고 싸우는 삼촌들, 상습적으로 엄마의 옷을 들추던 남자 어른들, 오줌 지린내가 가시지 않았던 할머니의 체취, 그곳에 어린 ‘상옥’이 있었다.”(박채영, <이것도 제 삶입니다>) 가난과 폭력, 모욕으로 인한 불안과 공포, 분노가 몸에 새겨졌다.
금주는 채영조차 “내 엄마가 저 엄마보다는 낫다”고 말하는 상옥의 엄마다. 흥 많고 재주 많은 이야기꾼이었지만 열여덟에 시집가서 딸만 낳는다고 구박받고, 남편의 외도를 견디며 평생 밭일하고, 치매 걸린 시어머니와 당뇨 걸린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살았다. 그러나 한 번도 자식에게 다정한 적이 없던 엄마, 딸들이 시동생에게 추행당해도 분노하지 못하는 엄마, 대신 매끼 밥을 먹고 칫솔로 목을 쑤셔 구토하면서 식도를 망가트린 엄마를 상옥은 용서하지 못한다. 상옥은 엄마 금주의 장례식에 친구를 한 명도 부르지 않았다.
어린 채영은 늘 이모 집이나 엄마 친구네 혹은 주인집에 맡겨졌다. 남의 집 밥상 앞에서 채영은 반찬 투정을 할 수도 없었고, 냉장고를 왈칵 열 수도 없었고, 눈치를 보지 않고 동그랑땡을 먹을 수도 없었다. 어린 채영은 생각한다. 몸이 작아서 조금만 먹게 된다면 엄마가 덜 고생하지 않을까? 중학생이 되었지만 채영은 학교에서 고립감을 느끼고 자퇴한다. 그러나 쓸모없는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뭔가를 해야 했다. 채영에게 그것은 음식을 절제하고 몸을 통제함으로써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는 최소한의 효능감을 얻는 것이었다. 그러다 받은 거식증 진단. 이후 채영이 세운 일상의 작은 규칙들은 모조리 거식증임을 증명하는 증세로 바뀌었다. 자책감과 우울과 만성적인 불안 속에서 거식은 폭식으로 이어지고 15년 동안 섭식장애는 ‘치료’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들이 키운 아이” 채영은 엄마와 할머니의 무기력과 불안만 물려받은 것은 아니다. 이모들과 대안학교 언니들의 강인함과 대범함도 물려받았다. 또한 서로의 고통을 해결해주지는 못하지만 외면하지 않는, 곁을 내주는 친구들도 있었다. 채영은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며 모녀 3대의 이야기를 다시 쓰기 시작한다.
할머니의 구토와 쌀쌀맞음은 희망 없는 삶을 지탱하기 위한 갑옷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고구마를 찌기 전 양쪽 끝을 잘라서 먹기 좋게 만들어주던, 다정했던 한순간을 기억한다. 엄마 상옥의 공적 삶에 대한 헌신이, 자기 몸에 새겨진 무기력에 잠식당하지 않으려는 평생에 걸친 분투였다는 것도 이해한다. 그리고 자신의 거식증이 엄마를 향한 그리움과 엄마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엄마의 부재에 대한 분노, 그 사이 언저리에서 생긴 것일 수 있다고 해석한다. 채영은 이제 엄마의 사과를 바라지 않는다. 엄마가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본인을 돌보지 못한 자기 자신이다.
채영은 살아남았다. 상옥도 딸의 거식증을 통해 미처 삼키지 못했던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여성이 가부장적 폭력 속에서 서로를 돌보고 연대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당신들이 불태우지 못한 마녀의 후손들”(실비아 페데리치)이다. 상옥과 채영의 삶을 응원한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더 많이 흘러넘치길 희망한다.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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