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유엔의 수난
지난 5주 동안 이스라엘의 무차별적 공격으로 1만명 이상 민간인이 숨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유엔 구호요원도 100명 이상 죽었다고 한다. 단일 분쟁 지역에서 유엔이 입은 가장 큰 인명 피해이다. 유엔총회에서 휴전 촉구 결의가 압도적 표차로 통과됐지만, 미국의 비호를 받는 이스라엘군이 이를 무시한 결과이다.
지난 6월 서아프리카 국가 말리는 2013년부터 자국에 주둔한 유엔 평화유지군에 연말까지 떠나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평화유지 임무는 러시아 용병집단 바그너그룹에 맡길 것이라고 했다. 국제 공공서비스가 특정 민간 기업에 대체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지난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무력화된 유엔 안보리의 권능과 ‘나눠진 세계’를 상징한다. 유엔의 권위 추락과 수난이 이렇게 심각한 적이 있었나 싶다.
국제법과 더불어, 유엔은 힘으로 타자를 굴복시키기 위해 전쟁을 동원하려는 충동을 제어하고 어떻게 하면 평화를 구축할 수 있을지 고민한 인간 이성의 산물이다. 전쟁 방지와 영원한 평화라는 이상은 18세기 초 유럽에서 국가연합을 구상한 생피에르의 <유럽 영구평화 설치안>에서 기원한다. 그의 사상은 루소의 <생피에르의 영구평화안 비판문> <전쟁상태론>을 거쳐 칸트의 <영구평화를 위하여>로 이어졌다. 칸트는 전쟁의 불가피성을 도덕적 명령으로 방지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봤고, 그 현실적 형태는 자유로운 공화국들의 연방 체제에 기초해야 한다고 봤다. 그런 이상주의는 정치의 본질을 모르는 순진함이라고 비판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저작은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국제연합, 즉 유엔이 만들어지는 사상적 기반이 됐다.
유엔의 역사를 보면 그것을 주도하는 강대국들이 없으면 제대로 유지되지 않으면서도 특정 국가가 너무 많은 힘을 갖고 있을 경우에도 무력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지금처럼 나눠진 세계에서 유엔의 평화유지 기능은 설 자리가 더 줄어들고 있다. 전쟁의 불똥이 어떤 화약고로 옮겨붙을지 모르는 이 시대에 유엔의 권위 약화, 유엔의 수난을 두고 볼 수 없다. ‘자유로운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진영’에 관계없이 그 책임이 있는 강대국들을 모두 비판할 수밖에 없다.
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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