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사방이 ‘거장의 빛’으로 물드는 50분···호크니가 직접 참여한 ‘몰입형 전시’
고덕동 ‘라이트룸 서울’로 고스란히
생존 작가 주도 프로젝트···전시장 5개면 채우는 기술력
오페라 무대 연출 등 60년 걸친 예술세계···끊임없는 탐구 열정 녹여
반 고흐와 클로드 모네 등의 명화를 거대한 영상과 사운드를 통해 ‘체험’할 수 있게 하는 몰입형 전시가 인기를 끌고 있다. 국내에서도 빛의벙커, 아르떼뮤지엄 등에서 명화를 소재로 한 몰입형 전시를 잇따라 선보였다. 거대한 화면을 화려하게 채우고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명화, 극적인 구성, 이에 어울리는 음악이 더해져 관객에게 감각을 압도하는 새로운 체험을 제공했다.
여기에 하나가 더해졌다. 단순한 추가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영국의 가장 유명한 화가이자 세계적인 명성과 인기를 누리는 데이비드 호크니가 직접 제작에 참여한 ‘데이비드 호크니: Bigger & Closer(not smaller & further away)’는 몰입형 전시를 한 차원 끌어올렸다. 새로운 기법과 실험에 주저함이 없는 호크니에게 몰입형 전시는 새롭고 ‘거대한’ 도구가 됐다. 호크니는 자신의 예술세계를 대중에게 펼쳐 보이기 위한 도구로써 몰입형 전시를 영리하게, 또 아름답게 활용했다. 서울 강동구 고덕동에 개관한 라이트룸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다.
지난 2월 런던에서 처음 선보인 라이트룸 런던의 이 몰입형 전시는 생존 작가인 호크니가 기획과 제작에 직접 참여했다는 점에서 다른 몰입형 전시와 차별점을 둔다. 라이트룸 런던 측은 “작가가 직접 주도하는 프로젝트를 통해 작가의 작업세계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 관람객과 작품의 관계를 재정의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예술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탐구할 수 있다”며 호크니를 설득했다. 너무나 유명한 파란 수영장 그림부터 호크니의 예술에 대한 생각과 열정, 원근법에 대한 탐구, 오페라 무대 연출 등 60년에 걸친 호크니의 예술세계를 다룬 몰입형 전시 ‘데이비드 호크니’는 이렇게 탄생했다.
갤러리현대의 도형태 대표와 메타버스 기반으로 운영되는 알타바그룹을 설립한 구준회 대표가 공동창업한 애트나컴퍼니는 영국 런던 킹스크로스에 위치한 몰입형 전시장 라이트룸 런던의 기술과 시설을 그대로 가져와 고덕동에 라이트룸 서울을 만들었다. 가로 18.5m, 세로 26m, 높이 12m의 전시장엔 5개 면을 채우는 28개의 고해상도 프로젝터, 1000개 이상의 사운드스피커를 탑재했다.
몰입형 전시는 새로운 예술적 체험인가, 아니면 ‘몰입형 쇼’에 불과한가. 몰입형 전시가 해외에 이어 국내에도 유행하면서 미술계에선 ‘볼거리’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다.
지난달 30일 라이트룸 서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리처드 슬래니 라이트룸 런던 최고경영자(CEO)는 “호크니와 3년간의 협업을 통해 작품을 선정하고 공간을 구성했다. 기존에 있던 작품을 그대로 벽면에 크게 쏜 게 아니라 작가와 함께 새롭게 작품으로 승화시킨 전시”라고 말했다.
라이트룸 서울 설립에 뛰어든 도형태 대표는 라이트룸 런던에서 처음 전시를 보고 “소름이 돋았다”고 표현했다. “생존하는 작가와의 협업을 통해 작가 자신이 담고 싶은 60년 예술 인생을 현존하는 최고의 기술을 이용해 대중과 접점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한 작품”이라며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작업을 새로운 방식으로 승화시키고 만들어나가는 면이 놀라웠다”고 말했다. 도 대표는 “미디어아트라는 장르가 30년간 발전을 해왔지만 테크니컬한 면에서 고비용의 장비를 이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한계와 제약이 있었다. 장기적으로 라이트룸 서울 시설을 통해 한국의 작가들도 높은 퀄리티의 미디어아트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전시엔 호크니가 선정한 100여점의 작품들이 등장하고, 직접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수천장과 드로잉을 보여준다. 호크니가 최근 아이패드로 자연을 그린 그림도 전시에 등장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관객들을 이끄는 것은 호크니의 목소리다.
시각과 청각을 압도하는 전시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음악을 제외하면 호크니의 나지막한 목소리뿐이다. 호크니는 편안하고 친근하게 자신의 작품 세계와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호크니가 자기 전시의 도슨트를 맡은 셈이다.
주제별로 ‘원근법 수업’ ‘호크니, 무대를 그리다’ ‘도로와 보도’ ‘카메라로 그린 드로잉’ ‘수영장’ ‘가까이서 바라보기’로 챕터를 나눠 진행되는 전시는 50분을 꽉 채운다. 원근법에 대한 이야기는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데, 호크니가 사진과 그림 등을 통해 꾸준히 원근법을 넘어서기 위한 시도를 해왔기 때문이다. ‘원근법 수업’이 예술 수업을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면, ‘호크니, 무대를 그리다’는 호크니가 작업한 오페라 무대가 웅장한 고전음악과 어우러져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무대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수영장’에선 호크니의 대표작이기도 한 캘리포니아 햇빛 아래 푸른 수영장을 그린 ‘예술가의 초상’ ‘더 큰 첨벙’ 등을 볼 수 있다. 로스앤젤레스 체류 시절 맛본 자유와 열정을 느낄 수 있다. “태양이 나를 로스앤젤레스로 이끈 것 같다. 로스엔젤레스는 날씨가 좋고 따듯한데, 밝고 색채가 풍부해 항상 섹시하기 때문이다.” 전시에서 성소수자인 호크니의 정체성은 전면에 나타나지 않지만, 푸른 물결과 그 속을 유영하는 나신의 남성들 모습은 생동감 있고 관능적으로 그려진다.
마지막 장인 ‘가까이서 바라보기’에선 호크니의 자연과 예술, 삶에 대한 생각을 느낄 수 있다. 호크니는 몰입형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겨울을 지나 봄이 깨어나는 모습을 아이패드로 그리며 제작진에게 보내왔는데, 그 드로잉들이 전시에 등장한다.
“자연이 솟아오르는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일어서는 때 말입니다. 마치 풀숲에 샴페인을 끼얹은 듯 보이는 때죠. …세계를 제대로 바라보면 정말 아름답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제대로 바라보지 않지요. 색상이란 즐거운 것입니다. 기쁨이 넘치는 것이지요. 저의 예술 또한 기쁨으로 가득했으면 합니다.”
수선화가 피어나고, 정원에 벚꽃이 피어나고, 연못 위로 비가 내리는 자연의 모습은 호크니의 손끝을 통해 생동하는 그림으로 재탄생하며 화면을 꽉 채운다. 그는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며 즐거운 듯 웃는다.
50분간의 전시가 끝난 뒤, 우리가 몰입한 대상은 거대한 화면과 움직이는 영상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다. 관객들이 몰입한 것은 호크니의 그림과 예술에 대한 탐구와 사랑, 시시각각 변하고 생동하는 삶에 대한 예술가의 사랑 그 자체였다. 전시의 마지막 메시지는 이렇다. “태양 혹은 죽음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없음을 기억하라. 삶을 사랑하라.” 내년 5월31일까지. 1만5000~2만7000원.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프고 계속 커지는 켈로이드 흉터··· 구멍내고 얼리면 더 빨리 치료된다
- “남잔데 숙대 지원했다”···교수님이 재워주는 ‘숙면여대’ 대박 비결은
- [스경X이슈] 반성문 소용無, ‘3아웃’ 박상민도 집유인데 김호중은 실형··· ‘괘씸죄’ 통했다
- ‘해를 품은 달’ 배우 송재림 숨진 채 발견
- 윤 대통령 골프 라운딩 논란…“트럼프 외교 준비” 대 “그 시간에 공부를”
- ‘검찰개혁 선봉’ 박은정, 혁신당 탄핵추진위 사임···왜?
- 한동훈 대표와 가족 명의로 수백건…윤 대통령 부부 비판 글의 정체는?
- “그는 사실상 대통령이 아니다” 1인 시국선언한 장학사…교육청은 “법률 위반 검토”
- 3200억대 가상자산 투자리딩 사기조직 체포… 역대 최대 규모
- 머스크가 이끌 ‘정부효율부’는 무엇…정부 부처 아닌 자문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