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평화재단 조례 개정 논란…과거사로 현재를 장악하려는 시도
[왜냐면] 최호근 | 고려대 사학과 교수
과거는 생각보다 훨씬 더 힘이 세다. 독일의 역사가 에른스트 놀테는 폭력과 희생으로 얼룩진 나치 역사를 ‘도무지 사라질 줄 모르는 과거’로 지칭했다. 부담스러운 과거보다는 자랑스러운 과거에, 과거보다는 미래에 집중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비판적 지성의 대명사인 하버마스는 놀테의 태도를 ‘핵폐기물 처리 심성’으로 지적하며, 부담스러운 과거의 유산은 땅속 깊이 파묻는 식으로 처리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시작된 역사가 논쟁은 2차 세계대전 패전 40주년인 1985년 내내 독일 사회를 뜨겁게 달궜다. 나치 역사도 ‘우리 역사’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한 뒤에 독일은 과거 청산의 모범생이 됐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과거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정율성 공원과 홍범도 동상에서 보듯, 죽은 이가 산 자를 지배하는 세상처럼 됐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과거 자체가 현재를 지배하는 경우는 없다. 과거사를 통해 현재를 장악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이 엄연한 현실을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에서 이렇게 갈파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과거를 지배하려는 욕망은 과거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통제로 표출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과거사를 다루는 사람과 기관을 장악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과거를 관리하려는 시도는 상하와 좌우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위험하다. 역사를 정치적 도구나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 전락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관리하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바뀌어왔다. 독재 시기에는 폭력과 검열을 애용했다. 4·3사건에 관해 보도하던 언론인들이 5·16 쿠데타 직후 옥고를 치른 것이 그 경우다. 독재가 끝난 뒤에도 통제의 유혹은 사라지지 않았다. 수년 전 국정 역사교과서에서 4·3에 관한 서술이 맥락이 증발한 채 축약됐다.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이 사건은 정책을 통해 과거를 지배하려는 과욕에서초래됐다.이제는 괜찮을까? 아직도 아니다. 행정을 통해 과거를 관리하려는 권력의 시도가 중앙과 지방을 가리지 않고 반복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제주도는 책임경영을 내세우며 제주4·3평화재단과 관련한 전부개정조례안을 입법예고했다. 이 내용과 이후 도의 행보가 일파만파를 초래하고 있다. 특히 상임 이사장제 도입과 도지사의 임명권 행사가 논란이다.
무엇보다 도의 판단이 근거 법률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출발했다는 지적을 주목한다. 4·3평화재단은 지자체 출자출연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을 온전히 적용할 수 있는 출연기관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다. 도는 행정의 관점에서 재단을 지자체 출연기관들 가운데 하나로 봤지만, 일반적 법률보다 상위에 있는 제주4·3특별법은 재단을 국가적 책무를 수행하는 전국적 기관으로 규정하고 있다. 독립적 재단법인의 장에 대해서라면 도지사가 임명권을 행사할 수 없다. 국가의 책임 때문에 제정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도 국가의 위법한 행위로 초래한 피해 구제를 위해 설립된 국가적 사무 수행 기구와 임원들의 독립성 보장을 명기하고 있다. 이는 국왕이라도 사관의 독립성을 건드릴 수 없었던 조선 시대의 전통과도 맞닿아 있다. 중첩적 과거사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사회적 합의의 선언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의 정신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법은 사회적 통념의 최소 표현이다. 과거와의 지속적 대면을 중재하는 국민적 기구를 책임정치나 효율 행정의 이름으로 관리하려는 시도는 시대착오적이다. 제주 4·3은 한갓 지역적 사안이 아닌 국민적 관심사다. 70주년을 계기로 우리 사회는 이제 4·3은 ‘우리의 역사’라고 화답했다. 성숙한 우리 사회가 기대하는 것은 과거의 선한 관리자가 되겠다는 지자체의 행정 의지가 아니다. 공권력의 오용과 남용이 아니었다면 4·3도 없었다는 것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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