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윤희칼럼] 놈놈놈 … 정치권의 지겨운 나이 집착
나이로 서열화하는 구태는
비효율 낳고 청년정치도 막아
나이타령 접고 실력 경쟁을
한국인들은 유독 나이에 민감하다. 낯선 사람을 만나 서로를 탐색할 때 가장 먼저 얻어내려는 정보가 나이다. 특히 남성들은 나이로 서열을 매기지 않고는 채 30분도 앉아 있지 못한다. 내가 너보다 형인지, 동생인지를 따지고 호칭까지 정리해야 비로소 정상적인 관계가 시작된다. 서로 언쟁을 벌일 때도 논리가 달리면 꼭 나이를 들먹인다. "너 몇 살이야." "나이도 어린 게." "나이를 어디로 드셨나." "나잇값 하셔요." "민증 깔까." 나이로 공격하고, 나이로 반격한다. 그러다 보니 '빠른 년생' '몇 월생' 운운하며 나이로 인한 불리함을 극복하려 한다.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 피의자인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한동훈 법무부 장관에게 "어린 놈이…"라고 발언하면서 '나이 갑질' 파문이 커지고 있다. 지난 9일 출판기념회에서 송 전 대표는 "이런 건방진 놈이 어디 있나. 어린 놈이 국회에 와서 인생 선배, 한참 검찰 선배를 조롱하고…"라고 했다. 영화 제목을 읊조린 것도 아니고, '놈놈놈'이 판치는 원색 비난을 쏟아부은 것. 분노해서 내뱉은 말이라고 해도 그의 무의식에 나이로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60세인 송 전 대표가 어리다고 깔아뭉갠 한 장관은 50세다. 송 전 대표는 과거 "꼰대정치 극복"을 외쳤는데 공적 관계에서 '어른 대접'을 요구하는 것은 꼰대적 발상을 넘어 비상식적이다. 장관이 연장자를 일일이 선배 대접해서야 어떻게 나랏일이 굴러가겠나.
외국에서는 관계에 있어 나이가 중요치 않은데 왜 한국에서는 이토록 나이에 집착할까. 이는 '장유유서' 문화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신분제로 인한 계급이 존재했지만 나이가 위아래를 결정 짓지는 않았다. 학문적 교류에 걸림돌이 되지도 않았다.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8년간의 계급장 뗀 토론 '사단칠정(四端七情) 논변'이 그 사례다. 둘은 무려 25세 차이가 났지만 기대승은 대학자인 이황의 논리를 거침없이 반박했고, 이황은 상대가 젊다고 하대하지 않았다. 좋은 벗의 상징인 오성과 한음도 5세 차이다. 나이 서열은 일제강점기 위계질서를 강요하는 군국주의와 군부독재의 잔재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존댓말과 반말이 구분되는, 연장자에게 유리한 한국어가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나이가 권력으로 작용하는 이런 관습은 소통을 가로막고, 업무 비효율과 사회적 갈등을 낳는다.
위계를 따지는 것은 정치권이 유독 심하다. 산업계에서는 젊은 벤처 최고경영자들이 탄생하면서 서열 문화가 깨지고 있지만, 정치권은 나이로 찍어 누르는 수직 문화가 여전하다. 그래도 송 전 대표는 운 좋게 37세에 금배지를 달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꺼낸 '젊은피 수혈론'의 수혜자다. 1980년대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소위 '86세대'는 세대교체 바람에 편승해 대거 국회에 입성했다. 이들은 젊음을 앞세워 중진 현역 의원들의 구태정치를 비판하고 개혁 세력을 자처했지만 스르르 기성정치에 편입됐다. 게다가 기득권 유지를 위해 청년 정치인이 올라올 사다리를 걷어찼다. 젊었을 때는 청년 정치가 진리라고 주장하다가, 나이 든 후에는 청년을 '어리다' '철없다'고 무시하는 것이다. '86 퇴진론'이 분출하는 이유다.
이런 권위적인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청년 정치는 요원하다. 국민의힘 혁신위원회도 최근 비례대표 국회의원 당선권에 45세 미만 청년을 50% 할당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무척 좋은 개혁안이지만 다수는 실현 가능성에 물음표를 단다. 뿌리 깊은 서열문화 탓에 선거철마다 청년 정치가 '흥행 불쏘시개'나 이벤트로 소모되는 것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나이 타령 말고 실력으로 경쟁하는 사회를 희망한다. 늦게 태어났다고 관계·소통에 있어 불평등을 감내하라는 건 불합리하지 않은가.
[심윤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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