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콩쿠르 휩쓰는 한국 진짜 클래식 강국 되려면

정주원 기자(jnwn@mk.co.kr) 2023. 11. 15.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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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쿠르 입상해야 그나마 공연할 기회 잡을 수 있어요" 전문연주자의 길 험난
2022년에 열린 밴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에서 최연소로 우승한 임윤찬의 연주 모습.

그 어느 때보다 K클래식이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임윤찬의 밴 클라이번 콩쿠르 최연소 우승 등 스타 연주자에 대한 대중의 관심 또한 높아졌다. 대한민국은 명실상부 클래식 '콩쿠르' 강국이다. 그러나 쏟아져 나오는 영재들을 뒷받침할 민간 기획사의 역량도, 기업들의 재정적 후원도, 시장 규모도 한참 뒤처져 있다. 연주자가 연주만 해도 먹고살 수 있는 환경의 조성, '연주계'를 이루는 것이 앞으로의 숙제다.

이제는 K팝에서 배울 때다. K팝과 K콘텐츠는 훌륭한 플레이어와 국내 기획사, 탄탄한 자본력, 해외 시장 등이 균형을 이루며 자생하는 생태계를 조성했다.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았다. 그에 비하면 K클래식은 갈 길이 멀다. 지금이야말로 대한민국 클래식 생태계의 불균형한 구조를 제대로 바꿔야 할 시간이다.

세계 무대에서 한국 클래식은 1965년 처음 빛을 봤다. 그해 한국인 최초로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한동일을 시작으로 1967년 레번트릿 콩쿠르에서 우승한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1971년 나움버그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백건우 등 1세대 대가들의 활약이 대단했다.

본격적으로 영재들이 주목받기 시작한 건 새천년의 도래와 함께였다. 2000년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14세 나이로 독일 에틀링겐 국제 청소년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 1위를 거머쥐면서다. 뒤이어 김선욱도 같은 대회에서 2004년 우승했다. 앞서 1994년 중국의 랑랑이 1등을 하는 등 세계적 연주자의 등용문으로 자리매김한 대회인데, 한국인 연주자가 잇달아 승전보를 올린 것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이후 2005년 임동혁의 쇼팽 콩쿠르 공동 3위, 2006년 김선욱의 리즈 콩쿠르 최연소 우승 등과 2015년 조성진의 쇼팽 콩쿠르 우승, 2021년 박재홍의 부조니 콩쿠르 우승, 2022년 임윤찬의 활약 등 세계적 권위의 대회에서 입상 계보가 이어졌다. 문제는 그 이후다. 전문 연주자로서 경력을 쌓기 위해선 매니지먼트사·기획사와 계약을 맺기까지가 '산 넘어 산'이다. 피아니스트에게 좋은 공연·앨범 발매의 기회를 주는 곳, 유명 악단·지휘자·공연장에 적극 소개·홍보해줄 수 있는 회사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속내를 모르는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국제 대회 우승 후엔 계약서가 밀려들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제자 김선욱이 리즈 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때만 해도 당장 모든 일이 잘 풀릴 줄 알았다. 결과적으론 유서 깊은 영국의 대형 기획사 아스코나스 홀트와 계약할 수 있었지만, 2년 동안은 허공에 붕 뜬 듯한 고군분투의 시간이었다. 당시 나는 훌륭한 연주자의 스승 자격으로 김선욱에 대한 국내외 계약 제안을 여러 건 검토했는데, 국내 기획사들은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역량이 거의 없었다. 더구나 국제적 역량은 말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해외 기획사에서 관심을 보여와도 난감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해오는 질문이 '자국 내 어느 기획사 소속이냐'는 것이었는데, 그땐 "없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미국·일본 등 큰 시장에선 나라가 달라도 회사끼리 선이 닿아 있어 아티스트 해외 진출도 쉽게 이뤄지지만, 우리나라엔 그런 네트워킹이 없었다. 그래도 김선욱은 당시 아스코나스 홀트 측 매니저가 말도 없이 2년 가까이 연주 무대를 따라다니며 지켜본 결과 성공적으로 계약이 성사된 경우다. 콩쿠르 1등 이후에도 소속사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결국 검증된 영재를 전문 연주자로 키워내려면 국내 민간 기획사가 앞장서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물론 국내 기획사들도 발전과 혁신을 거듭해왔다. 1980~1990년대까지만 해도 공연기획사라는 개념 자체가 국내에 없었고, 대행사에 불과했다. 개인 연주회를 열면 홍보 정도만 해줬기 때문에 각종 비용이며 초청권은 오롯이 아티스트가 부담하는 구조였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영재들의 등장과 함께 기획사 주도로 공연을 열고 마케팅도 전담하는 본연의 아성이 살아났다. 이들 기획사는 해외 연주자·악단의 내한 공연도 일본 기획사가 유치한 것을 재구매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직접 거래하는 구조를 확립하는 등 클래식 시장을 키우는 데 일조했다. 최근엔 빈체로, 크레디아, 마스트미디어 등 대형 기획사를 중심으로 아티스트 소속·관리 개념의 매니지먼트에도 나서기 시작했다.

고무적인 것은 새로운 비전과 전체적 흐름을 읽는 '3세대 매니지먼트' 회사도 활약하고 있다는 점이다. 2014년 설립된 더브릿지컴퍼니 같은 기획사는 국내 연주자의 해외 진출 활로를 찾는 데 적극적인 행보를 보인다. 해외 유명 공연을 수입해오는 데만 치중하지 않고, 해외 공연장을 발로 뛰면서 K클래식을 알린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변화다.

특히 앞으로 클래식 업계는 동남아 시장에 주목해야 한다. 최근 싱가포르와 베트남 등에서 선풍적인 클래식 열풍이 불고 있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린다. 한예종과의 학교 간 교류 차원에서 만난 관계자들에 따르면, 현지 학부모들의 예술 교육에 대한 열의가 상당하다는 전언이다. 우리나라 산업화 시대처럼 부모들이 자녀를 쫓아다니며 악보에 열심히 메모하거나 자녀 홍보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한다. 현지의 기반교육 수준이 높지는 않아서 대부분 연주자는 해외 유학을 떠나는 실정이라, 공연·교육 등 음악 사업으로 시장을 선점할 기회라고 생각된다.

이 모든 제언의 현실화를 위해선 재정적 뒷받침도 고민해야 한다. 현실적인 여건상 업계 자체적으로 수익성을 높이거나 정부 지원·개인 기부금을 늘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다행히도 많은 기업이 '메세나 활동'으로 문화예술계를 후원한다. 다만 후원 방식이 개선돼야 한다. 기업 후원이 클래식 생태계를 육성하는 방향으로 이뤄진다면 업계 전체가 바뀌는 마중물이 될 수 있다. 지금은 주로 스타 연주자가 나오거나 유서 깊은 해외 악단이 내한하면 후원사가 객석 표를 대거 사거나 소요 비용을 전담하는 방식인데, 일회성에 그친다는 점이 아쉽다.

특히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일본 역시 정부 지원, 개인 후원보다는 기업 후원이 활성화돼 있는데, 기업이 공연기획사를 대상으로 폭넓게 후원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되면 기획사는 신인 발굴이나 다양한 음악회를 개최할 여력이 생긴다. 현지 신인 아티스트 공연도 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클래식 기반을 탄탄하게 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일본 관객들의 예매 관람 문화도 연주계를 키운 주요 요인으로 분석된다. 우리나라는 흔히 무료로 배포한 초대권으로 객석을 채우곤 하는 반면, 일본에선 이름 모를 연주자의 독주회에 가도 음악 자체를 즐기러 공연 값을 낸 관객들로 객석이 꽉 차는 일이 예사다.

거울 앞에서 제자인 피아니스트 박재홍(왼쪽)의 넥타이를 매주는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그 덕분에 일본엔 '연주계'가 존재한다. '교육계' '산업계'란 말이 있는 것처럼 연주만으로 생계와 업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선 음악만으론 생계를 유지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더구나 관현악단에 상주할 수 없는 피아니스트에겐 더 어려운 일이다. 지속해서 돈을 벌려면 교육 혹은 지휘 등으로 경력을 전환해야 한다. 영재가 영재로서, 연주자가 연주자로서만 살기 어려운 사회인 셈이다.

이처럼 제반 환경이 낙후된 채로 머문다면 제2의 조성진·임윤찬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국 산업이 성장하지 않으면 해외 기획사 등으로 인재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우려도 든다. 중국 톈진에 설립된 줄리아드 음악 학교의 분교는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사례다. 중국의 많은 학생이 유학을 떠나지 않고도 명문 음악 교육을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중국 내 교육기관의 경쟁력과 위상, 인재 유출 측면에선 단점도 공존한다. 우리나라 클래식 시장이 자라나는 클래식 꿈나무를 품을 수 있는, 세계 클래식 시장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정도로 성장해 나가길 간절히 바란다.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정주원 기자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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