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원 영화관·3000원 국밥···“이 어르신들에게 어떻게 돈을 더 받을 수 있나요?”
“어르신들 주머니 사정 어려운데···”
판매가격 쉽게 올리지 못하는 업주들
노인들 “삶의 낙···여생 보내는 장소”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에 있는 실버영화관을 찾은 황영기씨(67)는 지갑에서 천원권 지폐 두 장을 꺼냈다. 1962년작 <자렌에서의 탈출> 표를 구매한 황씨는 “일주일에 6번은 온다”며 “대한극장에서 한 번 볼 돈으로 여기선 6번 넘게 볼 수 있다. 이게 삶의 낙이다”라고 했다.
경향신문은 지난 13일부터 이틀간 탑골공원 인근 상점을 찾은 노인 30명에게 말을 걸었다. 서울 구로구, 경기 부천시, 인천 부평구 등 수도권 각지에서 온 노인들은 탑골공원 근처에서 하루 1만원 이내로 하루를 보낸다고 했다. 인근에 있는 가게들에서는 ‘3000원 국밥’ ‘6000원 염색’ 등을 적은 간판이 눈에 띄었다. 업주들은 인건비, 재룟값, 전기·가스·수도 요금이 하루가 다르게 상승하고 있지만 쉽사리 판매가격을 올리지 못했다. “주머니 사정이 어려운 노인분들한테 돈을 더 받을 순 없다”는 것이다.
탑골공원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는 실버영화관은 2009년 개관 당시부터 한 번도 푯값을 올린 적이 없다. 김은주 실버영화관 대표(49)는 “어르신이 즐길 거리가 없고, 갈 곳이 없다. 우리 영화관이 노인 우울 문제를 해결했으면 좋겠다”며 “대한민국에서 나이 드는 것이 의미 있다고 느끼게끔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도 2000원이라는 가격을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고물가 시대에 영화관 운영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올해 한 달 평균 영화관 전기·수도요금은 600만원정도가 나왔다. 지난해보다 약 200만원 올랐다. 코로나19 이전에는 하루 1500명 정도가 극장을 찾았고 대기표도 200번까지 팔렸지만 최근에는 하루 500명정도로 손님이 줄었다. 김 대표는 개인 재산을 정리하고,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영화관을 운영하고 있다. 정부 지원은 없고, 이따금 기업이나 개인이 영화관 운영비를 보탠다고 한다.
노인들에게 이 영화관은 놀 거리가 있는 ‘소중한 장소’다. 김모씨(73)는 “추운 겨울, 더운 여름에 특별히 갈 곳이 없을 때 온다”며 “부담이 없어 일주일에 세 번씩 온다”고 했다. 영화를 본 김씨는 4000원짜리 칼국수를 먹으러 간다고 했다.
탑골공원 일대 식당도 노인들의 배를 따뜻하게 채우고 있다. 락희거리에 가자 식탁 6개에서 8개 규모의 작은 국밥집이 띄엄띄엄 있었다. 식당 네 곳은 국밥 한 그릇을 3000원~4000원에 팔고 있었다.
지난 13일 한 국밥집에 들어서자 한 남성이 시래깃국에 만 밥 위에 배추김치를 올려 한입 가득 집어넣었다. 이 남성은 “일주일에 한두 번 들른다”며 “가격도 저렴하고 맛있으니까 온다”고 했다. 이곳 시래깃국 한 그릇 가격은 3000원이다.
30년 넘게 이곳에서 장사해온 식당 주인 A씨는 “시작할 때 2000원이었는데 작년에 2500원, 올해 3000원으로 겨우 올렸다”고 했다. A씨는 “월세 생각하면 장사 못 한다”면서도 “가격 더 올리면 손님들이 못 온다”고 했다. 80만원이던 월 임대료는 4년 전 200만원으로 올랐다고 한다.
선지해장국 한 그릇 4000원, 소주 한 병 3000원에 파는 인근 식당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 황모씨(68)는 “소주가 더 비싸면 못 먹는다”며 “선짓국 한 그릇을 먹으면 하루를 잘 버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기 오는 사람들 다 상황이 비슷하다. 몹시 가난하지 않더라도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이다”며 잔에 소주를 따랐다.
‘멋쟁이’ 노인들은 탑골공원 인근 이발소로 몰린다. 종로3가역 인근에 있는 프랜차이즈 미용실 두 곳의 커트 가격은 각각 1만원, 2만원인 반면, 탑골공원 인근 이발소 커트 가격은 5000~6000원이다. 이발과 염색을 각각 6000원에 해주는 ‘파크이발’ 이용사 오용근씨(66)는 “우리도 사정이 어렵지만 가격을 못 올린다”며 “최근 손님이 줄었다. 사람들이 이발조차 안 한다는 건 정말 아주 어렵다는 의미”라고 했다.
탑골공원 곳곳에선 200원 믹스커피를 파는 자판기도 눈에 띄었다. 한 노인은 하나에 100원인 공병을 편의점에 팔기 위해 집에서 빈 소주병 5병을 챙겨 나왔다. 무료급식소가 준비되자 급식을 기다리는 줄이 생겼다. 부천시에서 지하철을 타고 온 이모씨(70)는 “여전히 싼 가게들이 있어서 다행”이라며 “밖에 나와서 할 거 없으면 나오지도 못한다”며 실버영화관을 나섰다. 60대인 이신영씨는 “오늘은 근처 복지관에서 4000원짜리 밥 먹고 왔다. 하루 만원 이상 쓰지 않는다”며 “여기는 노인들이 여생을 보내는 장소”라고 했다.
정효진 기자 hoho@kyunghyang.com,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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