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극 ‘패왕별희’, 중국·대만이 놀랄 것…김준수는 기적”
시각 예술 경극과 청각 예술 창극의 만남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우미인아, 우미인아, 너를 어찌한단 말이냐”
‘사면초가’였다. 단 한 번도 패한 적 없던 ‘전쟁의 신’ 항우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중이었다. 초한 시대의 해하성 전투. 전세는 이미 기울고,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가 들려오니 도망을 갈 수도 싸울 수도 없는 막다른 길로 내몰렸다. 그를 위로하는 것은 ‘일생의 연인’ 우희 뿐이었다.
붉은 드레스에 새하얀 얼굴, 단정한 이목구비, 긴 머리 위를 수놓은 머리 장식…. ‘우씨 성을 가진 미인(有美人姓虞氏)’(‘한서’ 중)이라 불리는 우희가 사뿐히 걸음을 옮기며 긴 칼 두 자루를 들고 검무를 시작한다. 항우의 재기를 기원하는 ‘최후의 춤’. 칼자루 하나당 1㎏, 양손에 쥔 칼을 공중에서 휘두르는 춤사위가 처연하다. 두 팔을 벌리고 허리를 90도로 꺾으면 우미인의 생도 비극으로 향한다. 장장 7분, 쌍검무를 추는 김준수는 영락없는 우희였다.
“사실 무대 위에서 이렇게 많이 움직이는 작품은 ‘패왕별희’가 처음이에요. 늘 노래에 더 집중했으니까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것도 어렵지만, 몸의 각도와 선을 살리는게 여전히 쉽지 않더라고요.” (김준수)
‘창극 프린스’로 불리는 김준수가 ‘여장남자’가 됐다. 국립창극단의 간판 스타이자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활동을 하는 그는 명실상부 ‘꽃미남 전담 배우’다. 김준수가 초나라의 절세가인 우희를 만나자, 몸짓과 눈빛이 달라졌다. 항우를 연기하는 배우 정보권은 그를 ‘우희 누나’로 부른다. ‘누나’ 소리가 절로 나올 법한 미모와 행동에 제작진은 “연습을 할수록 점점 예뻐진다”고 귀띔했다.
창극 ‘패왕별희’(18일까지·국립극장 해오름)가 4년 만에 돌아왔다. 2019년 봄, 가을 510석의 중극장에서 올라간 작품은 현재 1200여석의 대극장으로 옮겨와 규모를 키웠다. 최근 국립극장에서 만난 우싱궈 연출가는 “‘패왕별희’는 시대의 계승자의 성공과 실패, 천하를 호령하던 인물이 영토와 연인까지 모두 잃어버린 비극과 삶에 대한 애틋함, 연민의 정을 가득 채운 작품”이라며 “전쟁과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지금의 전 세계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중국 춘추전국 초한 시대의 역사를 담아낸 ‘패왕별희’. 총 2막 7장의 무대는 ‘난세의 영웅’ 항우와 연인 우희의 이야기를 큰 축으로 삼는다.
우희로 돌아온 김준수는 “4년 전 입던 옷에 몸을 맞추기 위해 2kg을 감량했고, 당시 아쉬웠던 점을 보완하기 위해 여러 면에서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무엇 하나 소홀하지 않았다 중점을 둔 것은 여성스러운 몸짓과 몸동작을 통한 연기, 감정의 표현이었다. 특히 “내면의 슬픔을 비롯한 감정적인 부분”에 신경 썼다고 한다.
우희는 어려운 역할이다. 살랑살랑 날아오르는 듯한 움직임, 다양한 의미를 담은 몸짓, 섬세한 손끝과 요염한 눈빛, 거기에 화려한 쌍검무와 노래 실력까지 더해야 한다. 때문에 경극에서도 ‘우희’ 역할은 ‘톱배우’들이 도맡는다.
“중국 경극에선 전통적으로 여성의 역할을 남자가 해왔는데, ‘패왕별희’의 우희 역할을 뽑을 때는 신중하게 캐스팅해요. 무엇보다 신체 조건이 잘 맞아야 하죠. (김)준수 배우는 오디션 현장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우희 그 자체였어요.” (우싱궈, 린슈웨이)
김준수가 우희를 맡자, 창극은 경극에서 담지 못한 우희의 다양한 면을 보여주게 됐다. 실제로 경극에서 우희의 분량은 상당히 적은 편인 데다, 그의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창극에선 그러나 우희의 분량이 대폭 늘었고, 우희와 항우의 절절한 감정이 ‘눈물 버튼’으로 작동한다 .
연출을 맡은 우싱궈와 그의 아내이자 극본과 안무를 맡은 린슈웨이는 “김준수는 한국의 매란방”이라며 “노래, 춤, 섬세한 감정 연기 등 이 모든 것을 해내는 것은 기적이다. 타고난 재능이라고 생각한다”고 입을 모았다.
배우의 어려움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작품의 ‘하이라이트’ 격인 쌍검무에서 허리를 꺾는 안무를 소화하기 위해 김준수는 도수치료까지 받았다. “4년 전 허리에 무리가 와서 무통주사를 맞았는데, 지금도 똑같이 하고 있어요. (웃음)” (김준수)
외모로는 의심할 여지없이 ‘우희’에 적격이나, 사실 김준수의 소리는 지극히 남성적이다. 그의 고민도 여기에서 시작됐다. 그는 “내 소리는 파워풀한 항우 스타일에 가까워 소리의 색을 바꿔야 했다”며 “가장 부드러운 내면의 소리를 찾아 표현했다”고 말했다. 우희의 노래 자체가 ‘정가(전통 성악의 한 갈래로, 아정한 노래라는 뜻) 풍’이 많아 그는 “진성을 쓰기 보단 가성을 활용했다”고 한다. “우희 역으로 소리를 하다 보면 종종 내지르고 싶어서 답답할 때가 많아요.(웃음)” (김준수)
김준수를 향한 우싱궈 연출과 린슈웨이 작가의 애정이 상당하다. 두 사람은 “경극에선 검무를 하며 노래를 하면 최고의 경지에 올라있다고 본다. 그는 중국, 대만의 모든 경극을 통틀어 1인자다. 꼭 대만에 진출했으면 좋겠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전 세계에 노래를 하는 극은 굉장히 많아요. 현대기술로 포장할 수도, 문명의 발전으로 기교를 입힐 수도 있어요. 하지만 창극은 달라요. 그것은 가슴 깊은 곳에서 나와 우주와 교류하고 소통하는 소리예요.” (우싱궈)
대만의 배우이자 당대전기극장 대표이기도 한 우싱궈 연출과 린슈웨이 작가의 작품 세계는 방대하다. 경극의 현대화 작업에 집중했고, 서양 고전을 경극으로 올리는 실험과 도전을 이어왔다. 창극과의 협업은 ‘패왕별희’가 처음이었다.
린슈웨이는 “창극 예술가를 위해 가창력은 물론 경극의 동작, 동선, 자세를 녹이고, 판소리를 위해 극적, 미학적, 문학적 경지를 넓히고자 했다”며 “시, 가사, 곡, 극, 무용을 모두 접목시켜 새로운 스타일을 연출할 수 있었다. 경극의 ‘패왕별희’가 한국 판소리의 ‘패왕별희’로 변신한 것은 대만과 한국 창작자의 지혜와 무대 위 배우와 악기, 모든 스태프들이 힘을 합쳐 만든 결과물”이라고 했다.
화려하게 채색한 경극의 외피를 입은 판소리의 세계는 독특한 미학으로 완성됐다. 영화 ‘와호장룡’으로 제73회 아카데미 미술상(Best Art Direction)을 받은 예진텐의 의상과 울긋불긋한 화장, 극도로 절제한 듯 하면서도 힘을 준 무대까지, 창극 사상 가장 다채로운 작품이었다. 지극히 ‘청각적’이었던 창극 무대가 찬란한 색채를 입자, 소리 너머의 감정들이 알록달록하게 묻어났다. 김준수는 “창극이 소리의 에너지로 간다면, 경극은 배우들의 선과 동작, 온몸의 에너지가 이끈다”며 “소리꾼의 목소리와 경극의 움직임이 결합했을 때 엄청난 힘으로 다가온다”고 말했다.
경극과 창극은 닮은 점도 적지 않다. 우싱궈 연출은 “경극은 고도로 담금질 된 공연예술”이라며 “소리 없이 노래하고 움직이지 않고 춤을 추는 예술이며 배우도 성악가, 무용가, 심지어 곡예, 쿵푸의 고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창극 역시 마찬가지다 창극 배우들도 노래하는 소리꾼이자, 연기하는 배우이며, 안무를 더해야할 무용수이기도 한다.
우싱궈 연출은 창극, 특히 판소리가 가진 힘이 경극과도 잘 어우러진다고 봤다. 그는 “창극의 강점은 인간 내면의 마음을 전달하고 천지 우주와 호응한다는 것”이라며 “판소리는 고독, 분노, 절규, 환희와 비극을 잘 표현하며, 우아하고 장엄하며 원시적이고 포효하며 서사시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다. 특히 중국 삼국시대나 전국시대 이야기와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대만의 거장 예술가 부부는 엔데믹과 함께 돌아온 ‘패왕별희’는 “창극은 물론 경극의 새로운 변곡점”이 되리라 확신했다.
“창극과 만나며 경극에 속했던 고전작품이 세계적인 예술적 가치를 가진 작품으로 거듭났다고 봐요. 그동안 많은 대표작을 냈고, 세계 곳곳에서 당대 작품을 만들었지만, 창극 ‘패왕별희’는 경극의 전통을 성공적으로 뛰어넘은 작품이에요. 매번 리허설을 볼 때마다 우리의 공연이 대만과 중국에 가서 사람들이 판소리의 위대함을 감상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경극 ‘패왕별희’와 경쟁해볼 만 하기 때문이에요. 분명 중국, 대만을 매우 놀라게 할 거예요.” (우싱궈, 린슈웨이)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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