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황정민이 황정민을 넘어서는 순간

아이즈 ize 이설(칼럼니스트) 2023. 11. 15.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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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ize 이설(칼럼니스트)

사진=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영화 '서울의 봄'(김성수 감독)을 보면서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참으로 기가 차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일대 사건'인데 고작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벌어지다니… 반란을 도모하는 쪽이나 이를 막으려는 쪽이나 오합지졸은 저리가라였다. 국운을 가른 쿠데타이지만 그 속에는 탐욕과 요행, 오판과 실책의 연속이었다.

역사책 속 한 줄로 접했던 12·12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총격적 서거 이후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임명된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0·26 사태에 대한 수사를 전담하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사태를 수습하다가 정승화 총장이 연루됐다며 강제연행한다. 이 과정에서 유혈 충돌이 빚어지고 전두환·노태우 등 이른바 '하나회' 출신의 신군부는 권력 장악의 야욕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이에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이 진압에 나서지만 신군부가 한발 앞서 육군본부를 점령하고, 꽁무니를 뺐던 노재현 국방장관을 굴복시킨 후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 총장 강제연행에 대한 사후 재가를 얻어내면서 결국 쿠데타에 성공한다.

대부분은 이런 결말을 잘 알고 있고, 심지어 전두환과 노태우가 1980년부터 1993년까지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을 이끌고, 김영삼 정부 때 5·18 특별법으로 단죄됐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즉, 엔딩이 너무나도 뻔한 스토리인 셈이다. 그러나 141분의 러닝타임 내내 지루함을 느낄 새는 없었다. 일촉즉발의 내전 상황과 긴장감 속에서 나도 모르게 발끝에 힘을 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김성수 감독의 노련한 연출, 꼼꼼한 시대 고증, 역사적 사실이 주는 무게감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전두광(전두환) 역을 맡은 황정민과 이태신(장태완)을 연기한 정우성의 열연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혹여 불거질 법적 시비 때문에 실명을 쓰진 못했으나 실존인물 뺨치는 분장과 캐릭터 연기는 '실명이 아닌 이름'의 한계를 충분히 뛰어넘고도 남는다.

사진=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황정민의 연기를 따라가다 보면 전두광 보안사령관의 야욕과 비열함에 치를 떨게 된다. 누가 봐도 확실한 대머리 분장이나 어깨에 별 2개를 단 군복이 주는 영향도 있겠지만 눈빛과 표정, 딱 맞아떨어지는 대사 소화력이 기가 막히다. 아무리 분장을 잘했어도 황정민과 전두환은 생김새나 보이스에서 이질감이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기우였다. 극 초반에 정우성과 마주치는 대목부터 황정민은 야망의 전두광으로 감쪽같이 탈바꿈한다.

개인적으론 요즘 황정민의 연기 스펙트럼이 서서히 한계에 도달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기도 했다. 황정민은 '신세계'의 정청, '베테랑'의 형사 서도철 등 수많은 흥행작에서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그러나 이들 캐릭터들이 표면적으론 극과 극을 달린다고 해도 묘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황정민 특유의 연기 패턴, 영화계 은어로는 연기에 '쪼'가 있었던 것. 한 사람이 연기하는 거니 당연할 수밖에 없는 일이긴 하다.

1994년 뮤지컬 '지하철 1호선'으로 데뷔했고,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한 것은 그보다 3∼4년 전이니 어느덧 연기 생활 30년의 베테랑. 게다가 대중에게 사랑받는 최고의 '천만 배우'인데 사실 자신만의 '쪼가 없는' 것도 이상할 수 있다. 어떤 배우는 평생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 하나 없이 사라지기도 하니까. 그에 비한다면 '쪼'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서울의 봄' 속 황정민은 이런 티끌만한 아쉬움마저도 초월하려는 듯한 의지를 보여준다. 아무리 최고의 배우라도 대머리 분장이 어디 쉬운 일이겠나. 하물며 배역은 논란의 대상인 전두환인데… 하지만 황정민은 파격적인 분장을 마다치 않고 자기식으로 전두광의 욕망을 재현해냈다. 엔딩에서 기괴하게 웃는 장면은 소름 끼치도록 사실적이다. 

반면 실존인물과의 정확한 싱크로율을 떠나, 참된 군인 정신을 보여준 이태신의 정우성은 새로운 리더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 같다. 우리는 그동안 전지전능한 슈퍼히어로를 너무 많이 봐왔다. 이제는 그런 판타지보다는 진짜를 보고 싶다. 그때 나타난 게 정우성의 이태신이다. 12·12의 결말을 훤히 알면서도, 실제 장태완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왠지 이태신을 응원하게 되는 건 아마도 정우성이라는 배우의 힘이 큰 역할을 했다.

필자가 김성수 감독이라면 전두광과 이태신의 캐릭터 톤을 어느 정도로 가져가야 할지가 무척 고민이었을 것 같다. 과연 쿠데타의 주동자이고, 대통령에까지 오른 인물을 어디까지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그는 반란군의 수괴인가, 아니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받지 않는다고 한 것처럼 결국 승자 스토리의 주인공인가.

그러나 적어도 김 감독은 이 점에 있어서만은 확고한 신념이 있었던 것 같다. 성공했다 해도 12·12는 군사 반란의 역사로 남아 있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불우한 역사를 초래한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그동안 변변한 한국영화가 보이지 않았는데  '서울의 봄'은 오랜만에 보물을 만난 것 같은 흥분을 선사한다. 영화 관람 후 두고두고 곱씹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남녀노소 누구나 아는 인물의 실화를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 요인은 충분해 보인다. 조심스럽게 흥행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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