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존엄’이란 포장 속에 숨은 편견
‘헌치백’, 장애와 인간의 존엄
의료윤리라는 분야에서 가장 많이 마주하는 단어 중 하나는 존엄이다.
생명의료윤리 분야에서 등장한 여러 장치와 제도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고안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인간과 존엄이라는 단어를 놓고 고민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존엄을 신체적 젊음의 구현이나 불쾌함의 부재로 이해하는 상황에선 더 그렇다. 이를테면 “존엄하지 않은 죽음”이라는 말을 들을 때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은 수준 이하의 돌봄이 주어지는 상황,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는 주체가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밥도, 세면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와중에 고통만 남은 채로 사망하는 광경인 듯싶다. 여러 문헌에서 존엄을 자유의 대치어로 이해하거나, 삶의 질이 특정 수준 이하로 하락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그래서 존엄한 삶이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삶이라고 이해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존엄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왔다. 존엄을 자율과 독립의 동의어로 읽는다면 우리 주변엔 그 자체로 존엄하지 않은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애초에 자유가 제한되어 있으며 삶의 질이 타인에 비해 낮은 것으로 평가되는 이들, 예컨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나 인지 능력에 손상이 있는 이는 존엄할 수 없다. 나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그 와중에 ‘헌치백’을 읽었다. 일본의 가장 큰 문학 신인상인 아쿠타가와상 2023년 수상작인 이 소설은 중증 장애를 가진 작가 이치카와 사오의 작품이다. 작가와 작품의 화자는 모두 근세관성 근병증(Myotubular Myopathy), 근육 세포 구조의 이상으로 전체적인 근육 기능이 약화하는 유전 질환을 가지고 있다.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소설의 고백이 작가 자신의 것은 아닐 테지만, 다른 이로선 쉽게 알 수 없는 장애 경험, 질환의 세부를 소설은 채용한다. 그리고 소설은 묻는다. 이런 장애를 가진 ‘나’도 임신하고, 그 태아를 중절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가.
임신중절을 선택하려 한다는 질문 자체가 큰 문제이자 충격으로 다가오는 만큼, 이 소설을 탐구하는 다른 지면에서도 많이 다루어질 것이라서 굳이 여기에서까지 다루고 싶지는 않다. 내가 살펴보고 싶은 것은 행위 자체의 선악 판단 다음의 것이다. 장애를 가진 여성이 임신과 중절을 욕망하는 사태가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소설에서 찾은 답변을 정리해 놓자. 이런 욕망은 인간의 경계와 존엄의 실천에 대한 탐구다. 소설을 빌어 이치카와는 묻는다. 인간은 무엇으로 정의되는가. 어떤 행위가 그를 존엄한 존재로, 즉 ‘인간’으로 만드는가. 소설의 두 장면을 통해 더 탐구해 보자.
인간은 파괴를 통해 만들어진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유전질환으로 인하여 다른 이들의 일상을 따라가는 것도 힘겨워진 샤카는 부모님이 만든 그룹홈(특정한 필요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돌봄을 받으며 생활하는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 부모님의 유산과 전문적인 활동보조사가 있어 샤카의 삶은 지속되고, 사이버대학을 다니고 조회수 낚시용 기사를 써서 송고하며 살아간다. 여러 트위터 계정을 만들어 생각의 편린들을 공유하는 것도 빼놓지 말자.
샤카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 ‘중절을 해보고 싶다’를 쫓는다. 자신이 다른 사람과 애정을 나누고 임신을 하는 것도 무척 어려운 일임을 알고 있다. 임신한다고 해도, 자기 몸은 뱃속에서 커가는 아기를 견딜 수 없으리라는 사실도 샤카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임신과 중절을 욕망한다. 왜 그런가.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기는 심적인 고뇌를 ‘모나리자’ 그림에 던졌던 요네즈 도모코의 심정 그 자체와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 ‘모나리자’를 더럽히고 싶어지는 이유는 있다. 박물관이든 도서관이든 보존되는 역사적 건조물이 나는 싫다. 완성된 모습으로 그곳에 계속 존재하는 오래된 것이 싫다. 파괴되지 않고 남아서 낡아가는 데 가치가 있는 것들이 싫은 것이다. 살아갈수록 내 몸은 비뚤어지고 파괴되어 간다. 죽음을 향해 파괴되어 가는 게 아니다. 살기 위해 파괴되고 살아낸 시간의 증거로서 파괴되어 간다. 그런 점이 비장애인이 걸리는 위중한 불치병과는 결정적으로 다르고, 다소의 시간 차가 있을 뿐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파괴되어 가는 비장애인의 노화와도 다르다. (60~61쪽)
샤카는 1974년 도쿄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레오나르도 다빈치 특별전시회가 혼잡하다는 이유로 장애인과 유아 동반자의 입장을 거부하자, 개최 첫날 ‘모나리자’에 스프레이를 뿌리는 테러를 한 요네즈 도모코를 호명한다. 그것은 장애인과 부모를 차별하는 박물관에 대한 저항이었지만, 샤카는 이 행위를 장애를 가진 신체의 표상으로 읽는다. ‘정상’이라서 늙고 병듦이라는 파괴가 그들의 생을 꺾는 일이 되는 비장애인의 삶과 달리, 적어도 샤카에게 장애의 생이란 파괴이자, 파괴의 흔적이 남긴 결과들로 정의된다.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비장애인은 파괴되면 자신의 ‘정상성’을 상실하는 것이므로, 그는 파괴를 거쳐 죽어간다. 장애인은 어떤 정상성도 가정하지 않기에, 그에게 파괴는(또는, 장애는, 질병은)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흔적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명백히 다른 인간에 대한 두 정의다. 하나는 특정한 삶이나 조건을 ‘인간’으로 정해놓고, 그 범주와 실천 안에 들어가는 삶만 인간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때 질병, 장애, 노화는 인간의 조건을 빼앗아 가는 것으로 이해되며 환자, 장애인, 노인은 인간에서 점차 멀어져 가는 존재가 된다. 다른 하나는 누군가와 환경이 빚어낸 흔적들을 모아 인간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때 질병, 장애, 노화는 개인을 다른 사람과 구별 짓는 기록이 된다.
존엄은 견디는 것이다
후자의 정의를 선택할 때 우리는 인간의 존엄에 관해 다른 사유에 도달한다. 예컨대, 다음의 진술을 참고해 보자.
벽 너머 옆방 입주자가 메마른 소리로 손뼉을 쳤다. 나와 비슷한 근 질환으로 자리보전 중인 옆방 여성은 침대 위 이동식 변기에 볼일을 보면 주방 근처에서 대기 중인 간병인에게 손뼉으로 신호를 보내 뒤처리를 부탁한다. 세상 사람들은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며 말할 것이다. “나라면 절대 못 견뎌. 나라면 죽음을 선택할 거야”라고. 하지만 그건 잘못된 것이다. 옆방의 그녀처럼 살아가는 것, 그것에야말로 인간의 존엄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참된 열반이 거기에 있다. 나는 아직 거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93~94쪽)
자기 몸을 마음대로 가눌 수 없어 용변 처리도 남에게 부탁해야 하는 삶을 우리는 보통 존엄하지 못한 삶으로, 살 가치가 없는 삶으로 이해한다. 그가 더는 존엄을 빼앗겨선 안 되므로, 우리는 그가 존엄하게 죽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주지하는 것처럼, 이것은 죽을 권리를 요청하는 존엄사/안락사의 핵심 주장 중 하나다.
샤카는 이런 주장에 정면으로 반대한다. 존엄은 살아가는 것, 아니 살아남는 것이다. 그에게 존엄은 견디는 것이다. 일견 상식에 벗어나는 이런 존엄에 관한 정의는 앞에서 내린 인간의 정의에서 나온다. 인간이 이런 것이라고 미리 정의해 놓는다면, 그 밖으로 벗어난 삶은 존엄하지 못하다. 그러나 어떤 삶이든 인간적인 것이며 인간다운 것이라면, 아니 샤카의 말처럼 우리의 파괴가 우리를 규정한다면, 그 모든 파괴를 감내하고 견디는 것이야말로 존엄하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이라면 견디지 못할 조건을 견뎌내며 살아가고 있는 ‘옆방 여성의 삶’은 존엄하다.
아픔을 견디는 생
이치카와가 도달한 인간과 존엄의 정의는 소설의 중심 줄거리보다 더 도발적이다. 그의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자기 파괴를 긍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준 이하의 삶도 존엄하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궁금하다.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오히려 그것은 특정한 인간을 정상으로 규정해 놓은 우리의 오류가 만들어 낸 허상은 아닌가.
물론 우리는 악과 부정의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치카와는 묻는다. 파괴는 악인가. 나쁜 삶의 질은 부정의인가. 오히려 그것들을 참을 수 없다고 치부하는 일이 악일 수 있다. 어떤 삶만이 긍정되고 어떤 삶들은 부정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부정의하다.
우리의 삶에는 분명 고통과 괴로움, 파괴와 혼란, 슬픔과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분명 우리는 그런 고통들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편, 그 아픔을 견디는 이들의 생은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후자는 잊혀졌으며 우리의 삶은 쾌락과 이익만을 절대가치로 돌아간다. ‘헌치백’은 그 삶을 내리쳐 다시 생각해 볼 것을 강제하는 채찍이다.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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