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자가 가문 도시에서 탄생한 혁신적인 오페라
민치오 호수 안으로 반도처럼 돌출된 땅에 위치한 북부 이탈리아의 아담한 도시 만토바는 평지에 세워져 있지만 시내 중심에는 직선으로 뚫린 길은 드물고, 크고 작은 길들이 마치 자연 발생한 유기체처럼 나 있다. 길을 걸으면서 시야의 변화를 느낄 수 있어 재미가 있다. 시내 중심가에 들어가려면 긴 회랑으로 이루어진 거리를 지나게 된다.
이 거리가 끝나면, 로마의 개선문을 다시 세운 것 같은 특이한 모양의 성 안드레아 성당이 눈앞에 나타난다. 이 성당은 다빈치에 버금가는 다재다능한 천재 알베르티(L. B. Alberti 1404-1472)가 설계한 것으로 초기 르네상스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처럼 만토바에 볼만한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이 있다는 것은 만토바가 한때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융성했던 곳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만토바는 14세기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만토바를 변모시킨 장본인은 곤자가 가문이었다. 이 가문의 등장은 만토바의 경제적 번영과 때를 같이한다. 르네상스 시대가 끝날 무렵의 통치자 빈첸쪼 곤자가(1587~1610)는 만토바를 문화와 과학의 중심지로 발전시키려는 야심을 갖고 화가 루벤스와 과학자 갈릴레이 같은 예술가와 과학자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참고로 곤자가(Gonzaga)는 우리나라 출판물에서 ‘곤차가’로 잘못 표기된 경우가 많다. 이탈리아어에서 z의 발음은 [z] 또는 [ts] 둘 중 하나인데, ‘곤자가’의 경우는 [z]에 해당한다.
곤자가 가문이 초빙한 인물 중에는 크레모나 출신의 유능한 젊은 음악가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도 있었다. 그가 곤자가 궁정에서 활동할 때 만토바는 음악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데, 이때 오늘날의 기준으로 봐서 오페라다운 오페라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탄생했다.
오페라의 기원은 16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악보가 전해지는 최초의 오페라는 야코포 페리의 <에우리디체>인데 이 작품은 프랑스 1600년 10월 프랑스 왕 앙리 4세와 메디치 가문의 마리아와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피렌체에서 공연되었다. 이 공연을 빈첸초 곤자가와 그의 둘째 아들 페르디난도도 지켜보았다. 빈첸쪼 곤자가는 메디치 가문의 엘레오노라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프랑스 왕비가 되는 마리아의 언니였다.
그 후 페르디난도 곤자가는 피렌체에서 난생 처음 보는 ‘음악극’에 매료되어 몬테베르디에게 피렌체에서 공연한 것과 비슷한 음악극을 한번 만들어 보라고 주문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몬테베르디는 그 당시까지 알려져 왔던 여러 가지의 음악 형식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줄 알았을 뿐 아니라, 새로운 음악에도 늘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누가 봐도 피렌체의 야코포 페리에 비하면 음악적으로 훨씬 뛰어난 음악가였다. 그는 마치 <에우리디체>에 맞서려는 듯, <오르페오>를 작곡하여 1607년 2월 24일 카니발 축제기간 중에 곤자가 궁 안에서 초연했다. 오르페오(Orfeo)는 오르페우스(Orpheus)의 이탈리아어 표기이다.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는 음악사에서 혁신적인 걸작으로 꼽힌다. 그 이전 피렌체에서 공연된 오페라에서 노래는 낭송 정도에 그쳤는데, 몬테베르디의 작품에서는 음악이 극을 이끌어 가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또 오케스트라의 편성도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였다. 오케스트라는 30명 이상이 연주를 했는데 이것은 야코포 페리의 오페라보다 무려 다섯 배나 큰 규모였다. 여러 가지 많은 악기는 목가적인 분위기, 무서운 저승 짐승들, 지하세계 왕 하데스의 엄숙한 명령 등을 생생하게 묘사했으며, 특히 노래는 등장인물의 성격과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따라서 가사의 내용을 잘 모르더라도 노래만 들으면 그 사람이 어떤 역을 맡았으며 어떤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지 알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획기적인 변화였다. 이처럼 만토바는 피렌체를 제치고 오페라의 도시도 우뚝 솟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몬테베르디는 만토바에서 그리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지 못했다. 궁정 관리들로부터 압박을 계속 받는 데다가, 급료도 상당히 낮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1612년 2월 빈첸초 곤자가가 사망하고 그의 장남 프란체스코가 만토바의 군주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통치자로서 아버지와는 너무나 달랐다. 그는 그해 8월에 다른 음악가들과 함께 몬테베르디를 뚜렷한 이유 없이 갑자기 집단 정리해고 했다.
몬테베르디는 고향 크레모나로 돌아갔고 새 일자리를 찾아 밀라노 궁정을 기웃거렸다. 그때 그에게 한줄기의 밝은 빛이 비쳤다. 모든 음악가가 선망하던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의 음악감독으로 초빙되었던 것이다. 베네치아는 음악가에 대한 대우가 파격적이었으니, 몬테베르디는 베네치아가 음악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만토바는 외부에서 모셔 온 유능한 인재를 그냥 놓쳐버리고 만 셈이다.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culturebox@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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