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열렬한 DJ 지지자 부친 생각하며 각본 맡았죠”
[짬][짬] ‘김대중 다큐’ 각본 쓰는 방현석 소설가
소설집 ‘내일을 여는 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 장편소설 ‘십년간’ ‘당신의 왼편’, 최근의 ‘범도’까지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는 창작 활동을 해온 소설가 방현석이 이번에는 영화 창작자로 변신했다. 내년 1월 개봉을 앞둔 다큐멘터리 ‘길위에 김대중’의 각본을 맡았다. 같은 중앙대 예술대학 동료 교수인 민환기 감독(영화학과)의 제안으로 합류했지만 뜻밖에 방 작가와 영화의 인연은 길고도 깊다. 장편소설 ‘범도’로 제17회 임종국상을 수상한 방현석 작가를 시상식이 열린 지난 10일 서울 종로3가 카페에서 만났다.
“인천에서 노동운동할 때 이은 감독이 찾아왔어요. 내 소설 ‘내딛는 첫발은’의 마지막 장면을 영화에 쓸 수 있냐고 요청해 나도 노동자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작품에) 베낀 건데 안 될 게 있겠냐고 흔쾌히 허락했어요. 당시 회사가 파업으로 폐업한다고 손 뗀 인천 한독금속 공장에서의 촬영까지 이어졌죠.” 1990년 영화판과 세상 모두를 뒤흔든 영화 ‘파업전야’ 이야기다.
그는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삼십만 명이 어두운 지하방에 기꺼이 욱여 앉고 영화 한 편의 상영을 막기 위해 헬기까지 동원되는 상황을 낳은 ‘파업전야’를 통해, 그리고 대중적 성공으로 남북관계에 대한 시각을 바꿔낸 ‘공동경비구역 JSA’를 통해 영화의 힘에 매료됐었다.
“역사를 바꾸는 예술작품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 두 작품이 그렇다고 생각해요. ‘공동경비구역 JSA’는 분단문제를 다룬 수많은 한국 소설을 뛰어넘은 작품이죠. 이처럼 현실을 바꾸는 큰 힘이 영화에 있다고 생각해 영화 제작에 뛰어들기도 했죠.”
2000년대 초 영화사를 직접 만들어 시나리오를 쓰고 단편 연출까지 했지만 “내가 할 일은 아니다. 제대로 된 영화 한 편 못 만들어 보고 인생 마감하겠다 싶어” 손을 뗀 전력이 있다. 그때의 경험으로 그는 소설과 영화 두 예술 장르의 서사구조를 비교하는 박사 논문을 썼고 단행본으로도 출간했다. ‘파업전야’(책임연출 장동홍)의 제작에 참여했던 이은 명필름 대표는 ‘공동경비구역 JSA’와 ‘길위에 김대중’ 제작자이기도 하다.
내년 1월 개봉 예정 ‘길위에 김대중’
중앙대 동료교수 민환기 감독이 제안에
“부친, 김대중 지지하다 린치당하기도”
“김대중은 정치에 대한 확신 강하고
주장·목표·삶 사이 괴리 없는 정치인”
2천년대 초 영화사 만들고 단편 연출
최근 소설 ‘범도’로 임종국상 받아
그가 ‘길위에 김대중’ 각본 작업을 한다고 했을 때 “안 그래도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문제로 소설 ‘범도’를 곱게 안 보려는 시선들이 있는데 이 작품까지 하면 색안경 끼고 보려는 사람들이 더 늘지 않겠냐”며 말리는 지인들도 있었단다. 그럼에도 그가 망설이지 않고 수락한 이유는 “울산에 살며 주변 사람들에게 미움받으면서도 끝까지 김대중을 지지했던, 돌아가신 아버지가 좋아하실 것 같아서”였다고. “글자를 익힐 때부터 김대중이라는 사람을 알았어요. 당시 우리 집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동아일보를 보는 집이었거든요. 아버지는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달 때 의견 광고를 낼 정도로 야성이 강한 분이었어요. 또 당시만 해도 경상도의 야당 지지자들은 하나같이 김영삼을 지지했는데 아버지 혼자 김대중을 지지하니까 린치를 당하신 적도 있었죠. 아버지는 항상 김대중이 가장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 대통령감이라고 말씀하셨더랬죠.”
방 작가는 김대중을 “꿈꾸는 세상을 먼저 살아낸 사람,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앞당겨서 산 사람”이라고 말했다. “많은 이들이 정치를 수단화하고, 현실을 바꾸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정치한다고 이중적 태도를 취합니다. 하지만 김대중은 정치의 기능에 대한 확신이 강했어요. 그래서 권력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걸 감추지 않으니까 대통령병 환자라는 비난까지 받아야 했죠. 자신의 주장과 목표와 삶 사이에 괴리가 없었던 점이 남달랐다고 생각합니다.”
방 작가는 “최대한 건조하게 객관적 사실을 압축해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도 사형선고 판결 때 김대중의 표정 등 디테일에도 집중을 했”지만 “영화는 감독의 예술인 만큼 감독의 결단대로 완성될 것”이라고 최종 권한을 민환기 감독에게 일임했다.
그는 고 김근태 의원을 그린 장편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를 쓰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도 그의 손끝에서 문학 작품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수업하면서 학생들에게 픽션은 논픽션의 반대가 아니라 논픽션 너머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논픽션이 보여주지 못하는 진실을 완전하게 보여주기 위해 픽션이 존재하는 것이죠. 자서전에 기록된 김대중의 삶을 어떤 픽션이 넘어설 수 있을까요? 숨김이나 윤색이 없는 서사와 진실이라는 측면에서 김대중 자서전을 뛰어넘는 픽션은 나오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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