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정너식 질문지" 노동계·학계, 근로시간 개편 설문조사 비판

최나실 2023. 11. 15. 04:3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①정부 "근로시간 개편 동의, 비동의보다 높아"
→"건강권 보장 단서 달아 답변 유도" 지적
②"노사 70% 이상이 주 60시간 근로상한 선택"
→현행 52시간과 60시간 사이 선택지 없어
이성희 고용노동부 차관이 13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근로시간 관련 대국민 설문조사 결과와 향후 정책 추진방향을 발표하고 있다. 이 차관은 설문조사 결과를 전폭적으로 수용해 주52시간제를 유지하되 일부 업종과 직종에 한해 개선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뉴시스

정부가 근로시간 개편 논의의 기초 자료로 제시한 대국민 설문조사의 설문 문항 설계를 두고 노동계와 학계에서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된다)'식이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몇몇 주요 항목에서 응답자가 선택할 수 있는 답안을 제한적으로 제시하거나, 중립적이어야 할 질문 내용에 단서 조항을 다는 등 특정 방향으로 답을 이끌어내려는 의도가 감지된다는 것이다. '근로자·사업주 모두 다수가 근로시간 상한으로 주 60시간을 택했다' 등 정부가 강조한 일부 설문 결과는 이런 '편향 조사'에서 비롯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고용노동부는 13일 '근로시간 관련 설문조사' 결과와 설문지를 공개하며 "연장근로 단위시간을 확대하는 방안에 노사 및 일반 국민 모두 '동의'가 '비동의'보다 크게 많았다"고 밝혔다. 현행 주 단위인 연장근로 단위시간을 월·분기·반기·연 단위로 확대하는 방안은 근로시간 개편 정책의 핵심인 만큼, 정부가 설문 결과를 토대로 개편의 정당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실제 결과를 보면, 근로자는 연장근로 단위 확대에 △동의 41.4% △보통 23.4% △비동의 29.8%로 답했다. 사업주는 △동의 38.2% △보통 28.9% △비동의 26.3%였다. '보통'이라는 응답률도 20%대로 상당했지만, 정부는 동의 비율이 비동의보다 높은 데 주목한 것이다.

한국노동연구원과 한국리서치가 수행한 '근로시간 관련 설문조사' 문항 12번 갈무리. 금속노조는 13일 낸 성명서에서 "설문이라기보다 설득"이라고 꼬집었다

해당 문항의 질문 방식 자체가 문제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주 최대 노동시간 제한, 휴식권 부여 등 근로자 건강권 보장 전제'라는 단서가 달린 데다가, 연장근로 단위 확대 시 특정 주에는 '주 52시간'을 넘겨 일해야 할 수 있다는 점은 제대로 밝히지 않은 채'주 평균 12시간 이하'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노동연구원 출신인 이주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제대로 물으려면 현행 주 12시간 대신 매달 52시간 이내, 분기당 156시간 이내 연장근로가 가능한 제도를 택하겠냐고 물어야 했다"고 꼬집었다. 금속노조는 "질문을 보면 단위 확대를 '바쁠 때 더 일하고 그렇지 않을 때 적게 일하는' 제도로 소개하면서 아무런 위험도 경고하지 않고, 그래도 모자랐는지 근로자 건강권을 보장한다는 전제를 깔았다"며 "어떻게든 긍정적 응답을 얻으려 설문을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제조업·생산직 등에는 근로시간제 개편 필요 응답이 많았다'고 내세운 대목에도 의구심이 제기된다.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 소장은 "전문가도 자신이 연구하지 않은 산업·업종은 연장근로 등 실태를 잘 모르는데, 16개 업종을 나열하며 일반 근로자에게 묻는 게 유의미한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근로시간 관련 설문조사' 문항 14번 갈무리. 노동계는 현행 주 52시간과 주 60시간 사이의 중간 선택지가 없다는 점을 비판한다. 개중 최대 근로시간이 가장 낮은 ①번 선택지를 노사 모두 압도적 비율(근로자 75.3%·사업주는 74.7%)로 택했지만, 중간 선택지가 있었다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언론 배포 보도자료에서는 빠졌지만 234쪽짜리 정량조사 결과 보고서 중에는 '관리 단위 확대 시 특정 주 내 최대 근로시간 제한 범위를 1주 60시간 이내로 해야 한다는 응답이 노·사 모두 70% 이상으로 가장 많다'는 대목도 있다. 얼핏 보면 노사 모두에서 '주 최대 60시간'에 대한 동의율이 높은 듯하지만, 이는 연장근로 단위가 확대된다는 전제하에 '주 최대 근로시간 제한이 필요한지' 묻고서 선택지를 △60시간 이내 △64시간 이내 △64시간 초과 세 개로만 제시한 결과다. 금속노조는 "60시간으로 상한을 정하기 위해 60시간 아래의 선택지를 준비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여론을 균형 있게 해석하려면 설문조사 내 다른 결과를 함께 봐야 한다고 제언한다. 박성우 직장갑질119 야근갑질특별위원장(노무사)은 "경제적 보상을 받을 수 있더라도 주 52시간 이상 일할 의사가 없다는 사람이 절반 이상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근로시간 개편 설문조사 결과 중 일부. 추가 소득을 위해 연장근로를 할 의향이 있는 경우는 전체 응답자 41.7%인 1,599명이다. 이 1,599명에게 다시 '일한 만큼의 정당한 보상과 휴식이 보장된다면 귀하는 현재 직장이 바쁠 때 1주 몇 시간까지 근로를 하실 의향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55.7%는 현행법상 가능한 '주 52시간 이내'라고 답했다. 주 60시간 이내나 그 이상 일하겠다고 한 경우는 39.7%로 인원(명)으로 환산하면 635명, 전체 응답자 중 16.5%다.

근로자를 상대로 '추가 소득을 위한 연장근로 의향 및 주 최대 근로시간'을 설문한 결과를 보면, 추가 수당을 줘도 연장근로 안 한다는 사람이 열 명 중 여섯(58.3%), 한다는 사람이 넷(41.7%)이었다. 특히 연장근로 의향을 밝힌 이들을 상대로 '정당한 보상과 휴식 보장'을 전제로 주당 몇 시간까지 일할 의향이 있냐고 되물었을 때 과반(55.7%)은 '주 52시간 이내'만 일하고 싶다고 답했다. 전체 근로자 응답자 가운데 주 60시간 이내 혹은 그 이상 일할 의향이 있다고 답한 비율은 16.5% 남짓했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바쁠 때는 조금 더 일할 의향이 있냐고 묻는 것과 강행규정인 근로시간 개편 방향을 묻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데 정책 결정을 설문으로 돌파하겠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며 설문 결과 해석에 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