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 가치, 33년만에 최저 임박
세계 3대 통화 중 하나이자 대표적 안전 자산으로 꼽히는 엔화 가치가 1달러당 152엔 수준까지 떨어져 1990년 이후 33년 만의 최저치에 근접했다. 미국 등 대부분 나라가 기준금리를 급격히 올리는 것과 대조적으로 일본은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유지하면서 외국과의 금리 차이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해외에 풀린 막대한 일본 투자금이 본국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도 엔저를 심화시키는 이유로 평가된다.
14일 아시아 외환시장에서 1달러당 엔화는 장중 151.7엔대에 거래됐다. 전날에는 1달러당 151.92엔 가까이 떨어져, 지난해 10월 기록한 최저 기록(1달러=151.94엔)에 육박했다. 1달러당 152엔을 뚫는다면 엔화 가치가 1990년 이후 최저 수준이 된다.
◇33년 만에 최저 수준 된 엔화 가치
스즈키 슌이치 일본 재무상은 14일 기자회견에서 “과도한 환율 변동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기본 생각”이라며 “계속해서 만전의 대응을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지난 1일 재무성 2인자 간다 마사토 재무관도 기자들에게 “시장 개입 대기 상태”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실제 일본 외환 당국이 엔화 약세에 제동을 걸기 위해 개입에 나설지는 미지수다. 지난달 엔화가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던 150엔에 닿았을 때도 일본 재무성은 외환시장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일본 당국이 구두 개입만으로 엔화 가치 하락을 용인하다시피 하는 것은, 지금의 엔화 약세가 기본적으로 미국과의 금리차에 따른 구조적 이유에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장기채 금리는 현재 연 4.6% 수준인데 비해 일본 장기채는 연 0.8% 수준으로 큰 차이가 난다. 최근 일본 시장 금리가 꽤 오르긴 했지만, 미국이 워낙 급격히 기준금리를 올린 탓에 그 격차는 더 크게 벌어졌다. 금리가 낮은 엔화를 빌려 금리가 높은 미국 같은 나라에 투자하려는 국제적 수요가 많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문제는 미국 고금리-일본 초저금리 상황이 당분간 좁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데에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지금의 고금리를 당분간 유지하겠다는 입장이고, 일본은 디플레이션에서 확실히 탈출하기 전까지는 마이너스 금리를 ‘제로’ 또는 ‘플러스’ 영역으로 올리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변정규 미즈호은행 서울지점 딜링룸 그룹장은 “연말까지 엔화 환율이 155엔 선을 터치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나쁜 엔저’ 넘어 ‘슬픈 엔저’로
기존에는 엔화 약세가 일본 수출품 가격 경쟁력을 높여 일본 경제에 플러스가 된다는 견해가 많았다. 하지만 많은 일본 제조 기업이 해외 현지에 생산 시설을 갖춰놓고 있어 엔저에 따른 수출 증대 효과보다는 수입 물가 상승이 더 뚜렷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런 측면에서 일본 현지 언론들은 최근의 엔저를 ‘나쁜 엔저’로 부르고 있다.
사카이 게이스케 미즈호 리서치·테크놀로지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장점보다 단점이 큰 ‘나쁜 엔저’를 넘어 지금은 ‘슬픈 엔저’에 돌입했다”고 말했다. 해외로 나가 있는 막대한 일본의 투자금이 본국으로 귀환하지 않은 채 해외에 머물러 있는 탓에 엔저가 심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코로나 이후 경제가 강한 회복력을 보인 반면, 일본은 물가가 3%가량 올랐지만 임금 상승률이 이에 못 미쳐 소비가 여전히 살아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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