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로 갈 주거 사다리 끊겼다… 전세사기에 무너지는 빌라 시장

정순우 기자 2023. 11. 15.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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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매매·전세 거래 20% 급감… 서울 신규 공급도 4분의 1 토막

최근 결혼한 김모(35)씨는 당초 직장 근처인 서울 광진구 빌라에 신혼집을 꾸릴 계획이었지만 직장 동료가 전세 사기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무리해서라도 아파트에 입주하기로 생각을 바꿨다. 하지만 모아둔 2억원으로 출퇴근 가능한 지역의 아파트 전세는 못 구해 매달 월세 150만원짜리 반(半)전세를 구했다. 김씨는 “전 재산 같은 보증금을 날릴 수 있다는 불안감보다 월세 부담이 낫다”고 했다.

작년 하반기부터 이어진 전세 사기 여파로 빌라 거래가 급감하고 공급도 끊기면서 서민 주거 사다리로 통하던 빌라 시장이 붕괴 위기에 처하고 있다. 사진은 서울 시내 한 빌라 밀집 지역의 모습. /이태경 기자

작년 하반기부터 전국에서 연쇄적으로 터진 전세 사기의 충격으로 빌라(다세대·연립주택) 시장이 붕괴 위기에 빠졌다. 빌라 중심으로 전세 사기가 터지는 탓에 기피 심리가 번져 매매·전세 모두 거래량이 20% 넘게 줄었고, 신규 인허가도 작년 1만1620가구(서울)에서 올해 2948가구로 4분의 1토막이 났다.

빌라는 한국 사회에서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하는 대표 주거 상품이다. 자금 여력이 없는 신혼부부나 사회 초년생이 집을 마련하는 데 필요한 돈을 모을 때까지 도심에서 큰 주거비 지출 없이 거주할 수 있는 수단은 고시원, 쪽방을 빼곤 빌라가 유일하다. 전세 사기 때문에 이 주거 사다리가 무너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청년들이 빌라 대신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결국 대출받아 아파트 전세를 구하거나 월세로 사는 것인데, 둘 다 주거비 부담이 늘어나 자산 형성에 걸림돌이 된다. 임차 수요가 아파트로 몰리면서 매매가격까지 올라가면 청년층의 집 마련은 더 어려워진다. 이창무 한양대 교수는 “빌라라는 주거 사다리가 무너지고 부동산 시장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청년층의 근로 의욕까지 무너뜨릴 수 있으므로 시장 정상화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래픽=김성규

서울 강서구는 3년 전까지만 해도 2030 신혼부부들의 첫 보금자리로 인기가 높았다. 여의도나 광화문으로 출퇴근하기 쉽고 신축 빌라도 많아 비교적 저렴하게 괜찮은 전셋집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년 하반기 전세 사기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강서구 화곡동에서 전세 사기범들이 활개 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지금은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한 공인 중개사는 “올해 들어 빌라는 월세 문의만 간혹 있고 전세는 찾는 사람이 없다”며 “보증보험 가입이 가능한 물건도 믿지 못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강서구에는 빌라가 총 7만3000여 가구 있는데 지난달 전세 거래는 411건에 그쳤다.

작년 기준 전국의 빌라는 약 280만채로 아파트(1200만채)보다는 적지만 주택 시장에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2030세대가 빌라에 전세로 살며 목돈을 마련하고 아파트로 옮겨가는 ‘주거 상향 이동’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서민이 자산을 형성하는 교과서적 경로였다. 하지만 전세 사기로 빌라 시장이 붕괴 위기를 맞아 청년층이 중산층으로 도약할 기회가 아예 사라지고 있다.

◇전세 사기 공포에 빌라 시장 붕괴 위기

14일 서울시 통계에 따르면, 올해 들어 9월까지 서울 빌라 전세 거래량은 5만3674건으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23% 줄었다. 전세 사기 공포에 월세를 선택하는 사람이 늘면서 전·월세 거래 중 전세 비율은 2020년 70%에서 올해 53%로 급락했다.

임차인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빌라를 사고파는 사람도 눈에 띄게 줄었다. 전국 빌라 매매 거래량은 올해 9월까지 6만3814건으로 2년 전(17만2305건)의 3분의 1 수준에 그친다. 서울 중랑구에서 8가구짜리 빌라 한 동을 임대하던 70대 양모씨는 “가진 빌라를 처분해 은행에 넣어두고 이자를 생활비에 보태려고 하는데 매물로 내놓은 지 6개월이 지나도록 가격 문의조차 없다”고 말했다.

◇서민 주거 안정 직격탄

빌라 신규 시장에도 경고등이 켜졌다. 빌라 인허가가 2021년(1~9월 기준) 4만6731가구에서 지난해 3만2609로 급감한 데 이어 올해는 1만1726가구에 그친다. 김광석 리얼하우스 대표는 “고금리와 공사비 급등 여파로 주택 공급이 전반적으로 부진하지만, 빌라는 전세 사기라는 특수 사안 때문에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전세 사기 예방 장치가 예전보다 강화됐기 때문에 앞으로 대규모 전세 사기가 새로 발생할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는 매매가격과 같거나 높은 가격에 전세 계약을 하는 방식으로 빌라 수백 채를 사들이는 ‘무자본 갭 투기’를 막기 위해 올해 5월부터 보증금이 매매 시세의 90%를 넘는 집은 보증보험을 발급하지 않고 있다. 또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안심 전세 앱을 통해 악성 임대인 정보가 공개되고 있어 세입자 스스로 전셋집의 위험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과 같은 빌라 공급 위축이 장기화하면 서민들이 피해를 볼 수 있으므로 조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정상적 임대 사업자들에게 세제 혜택 등 인센티브를 한시적으로라도 줌으로써 미등록 임대인의 등록을 독려해야 한다”며 “동시에 임대 사업자 관리 감독을 강화해 빌라 공급을 정상화하고 전세 시장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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