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시장경제 씨뿌린 통상·산업정책… 박정희 경제개발 계획으로 이어져
‘시장경제(market economy)’라는 말이 나오기 반 세기 전부터 이승만은 시장경제 신봉자였다. 그가 경제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1895년에 발간한 유길준의 ‘서유견문’에서 바깥세상의 상업과 교역을 알게 된 일이었다. 그 뒤로 세계 경제를, 특히 발전하고 융성하는 미국 경제를 공부하고 관찰하면서 그는 자신의 경제관을 세웠다.
1945년 6월 미국에서 그가 주도한 ‘대한민주당’이 창립되었다. 이 정당의 정책 가운데 하나는 “국제 통상을 장려함”이었다. 당시는 온 세계가 전쟁에 휩싸인 때였고, 나라마다 자급자족 경제(autarky)를 추구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과 그의 동지들은 국제 통상의 근본적 중요성을 인식한 것이었다.
“국제 통상 장려”라는 대한민주당의 정책은 이승만이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추구했음을 보여준다. 사회주의를 따르는 명령 경제 체제에선 국제 교역이 들어설 자리가 아주 좁다. 이 점은 이승만의 경제 사상을 이해하는 데 긴요하다. 대조적으로, 중경 임시정부가 1941년 11월에 공표한 ‘대한민국 건국 강령’은 사회주의적 세계관을 반영했다. 그래서 “전국의 토지와 대생산 기관의 국유”를 기본 경제정책으로 삼았다.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이끌게 되자, 그는 시장경제가 뿌리를 내리도록 힘썼다. 귀속 재산을 불하할 때, 그는 둘레의 반대를 물리치고 대기업들도 민간에 불하하도록 주선했다. 농지 개혁을 할 때도, 그는 ‘유상 몰수 유상 분배’를 원칙으로 삼아 시장경제의 기본인 재산권을 최대한 보호하면서 지주들의 보상금이 산업에 투자되도록 유도했다.
아울러 그는 국민들이 기업가 정신을 지니도록 독려했다. 한국 주재 외국인들이 한국 특색이 있는 성탄 카드와 선물을 고국으로 보내려 해도 마땅한 물건이 없다는 얘기를 듣자, 그는 담화를 발표했다.
“작년에 성탄 선물과 성탄 엽서를 많이 만들어서 팔게 하라는 담화를 낸 후에 그 성적이 매우 좋아서 외국인들이 이 엽서와 기념품을 사다가 자기 나라에 많이 보냈던 것인데, 우리 한국인들도 차차 눈이 떠서 1년 동안 틈틈이 만들어 두었다가 때맞춰 팔 것으로 기대했던 바, 금년에 아직도 이런 물건이 장에 나오거나 PX에 진열된 것이 도무지 없다. (…)
우리 경제를 걱정하는 친구들이 말하기를, 한국 풍속과 특색을 그린 엽서들이 일본에서 들어온다 하며, 한국에서 난 것이 있으면 이것을 쓰겠는데 부득이 일본 것을 사게 된다 하니 우리 경제 발전을 이런 데까지라도 주의하여 생각하지 못하면 세계에서 도와주려고 해도 생활 개선이 안 될 것이니, 모두 각성해서 부지런히 무엇이든 만들어 발전케 해야 할 것이다.”
경제개발 계획 수립
어렵사리 시장경제 체제를 갖추었지만, 1930년대 중엽에 시작된 중일전쟁 이래 큰 전쟁들을 치르느라 피폐한 한국 사회에서 민간 부문의 역량엔 큰 제약이 있었다. 아울러, 미국과 국제연합이 제공한 대규모 원조는 정부 부문의 합리적 계획을 요구했다.
이 대통령은 경제 발전을 위해선 전략적 분야에 대한 정부의 투자가 긴요하다는 점을 잘 인식했다. 대한민국이 서자, 그는 바로 ‘산업 부흥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1) 민수 공업품의 자급자족 2) 수출 공업 진흥 3) 중공업 육성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대한민국 역사에 처음 나온 ‘종합적 중기 계획’인 이 멋진 계획은 6·25전쟁으로 무산되었다.
휴전 반대를 철회하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었을 때, 그는 큰 군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경제 원조도 함께 얻었다. 그는 전략적 부문마다 ‘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해서 원조 자금이 효율적으로 쓰도록 독려했다.
이승만 정권이 만든 마지막 경제 계획은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인데, 총량적 목표와 그것들을 달성하기 위한 정책 수단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 이 모범적 경제개발 계획은 장면 정권과 박정희 정권에서 추진한 경제개발 계획의 바탕이 되었다.
미국의 경제 원조에서 상당 부분은 미국 국내에서 소비되고 남은 잉여 농산물이었다. 전쟁으로 국민들이 굶주리니, 잉여 농산물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선물이었다. 이런 농산물을 국내 시장에 판매한 대금은 ‘대충(對充) 계정(counterpart fund)’에 예치되고 미국과 협의해 사용되었다. 대충 자금은 미국이 10~20%를 경비로 쓰고 나머지는 한국 정부에서 썼다.
한국 정부가 쓰는 대충 자금 용도를 놓고, 한국과 미국 사이엔 늘 의견 차이가 있었다. 미국 정부는 미국과 일본에서 소비재를 많이 들여오라고 권고했고, 한국 정부는 자금의 큰 부분을 산업 시설에 투자해서 산업화의 길로 들어서겠다고 주장했다. 이 대통령은 꿋꿋이 산업화 정책을 밀고 나가서, 당장 필요한 기반 시설들을 건설했다.
1959년에 건설한 충주 비료 공장은 대표적이다. 미국은 한국으로 하여금 자국에서 생산된 비료를 수입하도록 했다. 남는 농산물을 원조해주고 자국 비료를 사 가도록 한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그렇게 농업 부문이 미국에 예속되는 것을 거부하고 원조 자금으로 비료 공장을 먼저 세웠다. 이보다 두 해 전엔 문경 시멘트 공장과 인천 판유리 공장을 건설했다.
미 군정 시기에 북한이 전기를 끊어서 석탄 수요가 커졌다. 대한민국 정부가 서자, 석탄 수송 철도인 삼척탄광선, 영월탄광선, 단양탄광선 부설이 시작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 모두 부설되었다.
에너지 수요의 빠른 증가에 대응하여, 발전소도 여럿이 건설되었다. 화력발전소인 당인리 3호기, 마산 1·2호기, 삼척 1호기와 화천 수력 2호기가 건설되어 전력 12만7000kw를 공급했다
세 해가 넘는 전쟁으로 사회의 거의 모든 기반이 무너진 상황에서 이처럼 효과적인 산업 시설 건설은 경이롭다. 많은 피란민을 받아들여 재우고 먹이는 일에도 벅찬 터에, 앞날을 내다보고 절대적 영향력을 지닌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산업 기반 시설에 투자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이 대통령의 인품과 통찰력을 깊이 성찰하도록 만든다.
그가 1959년 3월에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고 7월에 우리나라 최초의 소형 연구용 원자로를 기공한 것을 알게 되면, 그런 성찰은 깊이를 더한다. 아직 전란의 상흔이 도처에 남은 시절에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먼 미래를 위해 투자한 것이었다. 당시 그를 비웃은 사람들은 그를 제어하지 못해서 앙앙불락한 주한 미국 대사관 사람들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처럼 경제 부흥에 애쓴 덕분에 우리 경제는 빠르게 발전했다. 전후의 연간 성장률은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 1954년 9.5%, 1955년 5.6%, 1956년 0.6%, 1957년 9.4%, 1958년 6.6%, 1959년 5.6%였다.
이처럼 빠른 경제 발전이 가능하도록 만든 요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 한국 정부가 부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외국에서 많은 원조가 들어오면, 그것을 쓰는 과정에서 부패가 따르는 것이 상례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원조는 효율적으로 빈민 구호와 산업 개발에 투입되었다.
그런 효율적 행정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이승만 정권이 예상보다 훨씬 깨끗했다는 사정이었다. 길고 파괴적인 전쟁은 도덕 수준을 낮추고 법의 엄정한 집행을 방해하고 권력을 쥔 자들의 행패를 부른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에서 부패한 고위 관료들은 오래가지 못했다.
휴전 직후인 1953년 9월 10일, 이 대통령은 “정부 관공리가 민간에 나가서 재산이나 물자를 토색(討索)하는 것은 유래(由來)로 다스리는 것이오, 더욱이 민국에 있어서는 이를 엄금하는 법률이 자재(自在)하고 당국에서 엄절(嚴切)히 집행해가는 중인데, 근래에 정령(政令)이 해이해저서 지방에서 토색하는 것이 50~60종류에 이른다는 것은 실로 놀랄 만한 일이다”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리고 감독 책임을 물어 내무부장관, 농림부장관 및 내무부 지방국장을 즉각 파면했다.
이처럼 단호하게 부패에 대해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대통령 자신이 청렴하고 늘 국민을 보살폈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중공군에 패해서 서울을 다시 공산군에 빼앗길 급박한 상황이었던 1950년 12월 27일에 프란체스카 여사가 ‘난중일기’에 기록한 일화는 그의 성품을 전한다.
“대통령은 일선으로 시찰 떠나는 신(성모) 국방장관이 장갑이 없는 것을 알게 되자, 내가 이번 크리스마스 때 대통령에게 선물했던 장갑을 사양하는 그에게 억지로 주어 보냈다고 한다.
부상병들을 위문한 후 대통령은 서울역 부근을 돌아보았다. 추위 속에서 대통령이 장갑도 끼지 않고 맨손으로 돌아보는 것을 본 어떤 노인이 불에 데워 (종이와 헝겊으로) 꼭꼭 싸서 손에 쥐고 있던 따뜻한 조약돌을 대통령에게 주었다. 그에 대한 답례로 대통령은 호주머니에 있던 작은 잣 주머니를 피난 가는 노인에게 선물했다고 김장흥 총경이 말해주었다.”
인하공대 설립
1952년 11월 부산 경무대에서 이 대통령은 김법린 문교부장관에게 지시했다. “김 장관, 한국의 MIT를 세우도록 하시오.” 전쟁이 끝나면 무너진 산업을 일으켜야 하는데, 그 일에 긴요한 요소가 기술 인력이라는 뜻이었다.
마침 그해는 하와이 이민 50주년이었다. 1902년 12월에 121명이 일본 여객선 겐카이마루를 타고 제물포를 떠났다. 이들 가운데 절반가량이 조지 존스 목사 부부가 운영하던 안골예배당(내리교회) 신도였다. 그래서 하와이 이민 다수는 기독교 신앙이 깊었고, 이민 사회는 침례교회 중심으로 움직였다. 세 해가 채 못 되는 기간에 7500명가량 되는 조선인들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하와이 이민은 조선 역사상 첫 공식 이민이었고 가장 성공적인 집단 이민이었다. 그리고 하와이는 이승만의 ‘제2의 고향’이었다. 그는 1913년부터 하와이의 젊은 세대를 가르쳤고 그곳 동포들의 충실한 지지 덕분에 긴 세월을 독립운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대통령은 하와이 이민 50주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인천에 좋은 공대를 세우기로 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하와이에 설립해서 운영했던 ‘한인기독학원’을 처분한 대금을 대학 설립의 종잣돈으로 삼았다. 그 돈에 하와이 동포들의 성금과 국고 보조금을 보태서 대학 설립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다. 대학 이름은 인천의 인(仁)자와 하와이의 하(荷)에서 따서 인하공과대학(IIT)이라 지었다. 두 해 뒤, 금속, 기계, 광산, 전기, 조선, 화학공학 여섯 학과에서 신입생 179명을 받아들였다.
그가 처음 공대 설립을 밝히자, 미국 대사관 사람들은 드러내놓고 비웃었다. 치열한 전쟁을 하느라 생존을 걱정하는 나라에서 웬 공대냐는 얘기였다. 이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1958년엔 인하공대와 서울공대에 원자력학과를 설치하도록 했다. 이듬해에 원자력연구소를 세우고 시험용 원자로를 설치하려는 계획에 선행하는 조치였다. 그 뒤 일은 우리가 잘 아는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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