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진 청바지에 늘어진 셔츠… 자유로운 패션 어때요
가을겨울 ‘그런지코어 룩’ 봇물
찢어진 데님에 시스루 재질 연결해… 빛바랜 색상, 과감한 믹스매치도
단정한 ‘올드머니룩’과 대비… 자유로움 추구 MZ세대 주목
음악과 함께 두고두고 회자되는 그의 너저분한 길거리 패션은 엘리트주의의 산물인 여피 스타일에 반기를 든 X세대의 추종을 받으며 ‘그런지 룩’이라는 새로운 패션 장르를 탄생시켰다. 그런지(Grunge)는 본디 ‘지저분한’ ‘불결한’ ‘질이 떨어지는’이란 뜻. 중고 의류 매장에서 구매한 것같이 너무 크거나 작은, 혹은 낡아 보이는 의상을 착용하는 패션 스타일을 말한다.
하위문화를 대표하던 그런지 룩을 하이패션에서 시도한 건 혈기왕성한 29세의 젊은 디자이너 마크 제이컵스에 의해서다. 평소 그런지 음악과 뮤지션들의 자유분방한 패션에 심취했던 그는 1993년 커트 코베인에게서 영감을 받은 ‘페리 엘리스’ 봄여름 컬렉션을 선보이며 도마에 오른다. 큼직한 플란넬 체크 셔츠에 프린트 티셔츠, 듬성듬성 짠 스웨터, 군용 장화 등을 믹스 매치한 커트 코베인 스타일의 그런지 컬렉션은 패션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너무 앞서 나갔던 걸까. 비평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으며 마크 제이컵스는 페리 엘리스에서 해고당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해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가 선정한 1992년 올해의 여성복 디자이너 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에 마크 제이컵스라는 이름을 단단히 각인시켰다. 이후 그런지 패션은 라프 시몬스, 에디 슬리먼 등 유명 하이패션 디자이너들의 손에 의해 재해석되며 점차 비주류에서 주류로 옮겨와 1990년대를 대표하는 주요 스타일로 자리매김했다.
Y2K(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의 거대한 기류와 함께 잠시 주춤했던 그런지 패션은 그런지코어 룩(Grungecore Look)이라는 이름을 달고 이번 가을겨울 시즌 다시 조명받고 있다. 디자이너들이 담합이라도 한 듯 그런지 룩을 복기하고 나선 것. 커트 코베인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지 룩을 생생하게 재현한 디스퀘어드2가 대표적이다. 찢고 깁고 덧대는 방식으로 표현된 다채로운 데님 피스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며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럭셔리 데님을 표방하는 디젤 역시 마찬가지. 디스트로이드 데님 재킷과 팬츠에 보디라인이 드러나는 시스루 소재를 덧댄 파격적인 행보로 한 차원 더 수준 높은 그런지 룩을 완성했다. 드리스 반 노튼도 주목할 만하다. 빛바랜 색감의 프린팅 팬츠에 한껏 늘어진 여유로운 티셔츠와 재킷 또는 카디건을 더해 이전의 정돈된 컬렉션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짜릿한 일탈과 해방감을 선사했다. 그런가 하면 지방시는 그런지 룩의 대명사로 불리는 플란넬 직물로 짠 체크무늬 셔츠, 팬츠 등의 아이템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며 그런지 무드를 오롯이 느낄 수 있게 했다. 그 밖에 워싱 디테일의 빈티지한 블랙 데님으로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드러낸 루이비통과 돌체앤가바나, 각기 다른 패턴의 티셔츠와 셔츠를 겹쳐 입고 하이 웨이스트 데님 팬츠로 허리춤을 한껏 추켜세워 연출한 에곤 랩, 터틀넥, 스웨터, 카디건 등의 니트류를 대거 선보인 에트로 등이 그런지코어 룩 트렌드를 여실히 보여준 예다.
그런지코어 룩 연출의 핵심은 손에 집히는 대로 입고 나온 듯한 쿨한 애티튜드에 있다. 각기 다른 소재와 길이의 톱을 겹쳐 입거나 예측 불가능한 컬러와 패턴의 과감한 믹스매치도 한 번쯤 도전해볼 만하다. 여기에 커트 코베인의 시그니처인 오벌 선글라스와 스니커즈를 더해 마무리하면 끝. 사회에서 통용되는 미의 기준이 아닌 불완전의 미학을 추구하는 그런지 패션은 자신감 있게 밀어붙일 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다른 누군가가 되어 사랑받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미움받는 것이 낫다”는 커트 코베인의 말을 되새기며 옷장 문을 힘껏 열어보자.
안미은 패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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