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弔旗는 이재명도 보냈다
대통령이 빈소 찾았다면 ‘국가 품격’ 높아졌을 것
육군 7사단 1연대 3대대 김성태 이등중사(하사)는 북한의 남침 당시 18세였다. 부상한 중대장을 업고 뛰다 박격포탄 파편에 맞아 참전 닷새 만에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포로수용소와 교화소 3곳을 합쳐 20년 가까이 복역한 뒤 함경도 탄광으로 끌려갔다. 4차례 탈출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김 하사처럼 정전 후에도 돌아오지 못한 국군 포로는 최소 5만명이다.
북한 사회 최하위 성분이 된 이들은 감시와 차별 속에 오지의 탄광·광산에서 강제 노역에 내몰렸다. 탄광은 3교대로 24시간 돌아갔고 휴일은 한 달에 하루였다. 폭발, 붕괴 사고가 빈발해도 구조 작업은 없었다. 대를 이어 그렇게 살았다. 특작부대 구출 작전도, 남북 간 석방 교섭도 없었다.
2000년 봄 한국 대통령이 곧 방북한다는 소식이 지하 막장에도 전해졌다. 칠순이 된 포로들은 대통령과 함께 고향 갈 생각에 들떴다. 말쑥한 차림으로 부모·형제를 보겠다며 옷도 맞췄다. 한국을 너무 몰랐다. 몇 달 뒤 조선중앙TV는 남파 간첩, 빨치산 출신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벤츠 38대에 나눠 타고 평양에서 카퍼레이드하는 광경을 방송했다. 그즈음부터 국군 포로들의 탈출이 본격화했다. 귀환 국군 포로 80명 중 72명의 탈북 시기가 2000년 이후다. 4전 5기로 한국행에 성공, 2001년 8월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연병장에서 전역 신고를 한 김성태 하사도 그중 하나다.
국가 도움은 없었다. 80명 대부분이 자력 탈출이거나 지원 단체 조력을 받았다. 국방부와 외교부는 중국으로 탈출한 국군 포로들의 구조 요청을 외면해 논란이 됐다. 돌아온 뒤에도 홀대했다. 국군 포로 등급제란 것이 있다. 강제 노역까지 ‘간접적 적대 행위’로 규정해 낮은 등급을 부여하고 지원금에 차별을 둔다. 전쟁 포로를 영웅시하는 문명국들이 귀를 의심할 일이다. 일제의 잔재다. “포로가 될 바엔 자결하라”던 도조 히데키의 ‘전진훈’(戰陣訓)식 발상이다.
김성태 예비역 하사가 보름 전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작년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받은 것을 구십 평생 가장 뿌듯한 일로 꼽았다. 국군의날 행사에도 초청받아 대통령과 조우했다. 이런 일을 정부의 태도 변화로 여긴 유족과 지원 단체들이 대통령 조문을 기대했을 법하다. 대통령이 빈소를 찾았다면 “국가의 품격은 국가가 누구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달렸다. 제복 입은 영웅을 끝까지 예우하는 건 국가의 책무”라고 한 현충일 추념사의 울림은 더 컸을 것이다.
용산 참모들이 대통령 조문에 난색을 보였다고 한다. “바쁜 대통령이 이분들 작고할 때마다 갈 순 없잖느냐”는 식이었다. 국군수도병원 빈소엔 관례대로 대통령 명의 조화(弔花)가 전달됐다. 화제가 된 것은 민주당 대표가 보낸 조기(弔旗)였다. 최초였다. 국가 품격까지 거론한 군통수권자와 안보관을 의심받아 온 사람의 예우가 결과적으로 비슷했다.
2009년 10월 29일 C-17 수송기가 카불에서 도버 공군기지로 공수해 온 전사자 유해 18구 앞에 거수경례를 붙이기 위해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헬기장에서 마린원에 탑승한 시각은 새벽 3시였다. 2011년 8월 9일에도 이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운구돼 온 전몰 장병 유해 30구에 예를 표하기 위해 몇 달간 준비한 연설을 당일 취소했다. 강한 국가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김 하사의 유언은 “전우들이 잠든 국립묘지에 묻어달라”였다. 서울현충원 측은 공간 부족을 이유로 매장에 부정적이라고 한다. 유골을 화장해 봉안당에 갖다 놓았다. 서울현충원 면적은 143만㎡, 묘역만 35만㎡다. 이장(移葬)으로 생긴 공묘(空墓)도 200기가 넘는다. 고인은 생전에 “공묘도 상관없다”고 했다. 육군 현역 군인으로 적지에서 반세기를 분투한 6·25 참전 용사의 마지막 소원이다. 인색할 게 따로 있다. 생존 국군 포로는 이제 1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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