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직필] 재정지출이 정말 물가를 올릴까
지난 1일 윤석열 대통령은 “재정을 더 늘리면 물가 때문에 또 서민들이 죽는다”고 했다. 정부가 나라살림을 긴축하지 않고 지출을 늘리면 물가가 올라 민생이 힘들어진다는 진단이다. 물가가 오르면 민생이 힘들어지는 것이야 두말할 것 없다. 작년 2분기부터 지난 8월까지 소비자물가는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평균 4.7% 올랐는데 통계청 사업체노동력조사 결과에 따르면 임금은 3.2% 상승에 그쳐 실질임금은 5개 분기 넘게 평균 1.5% 하락했다. 이렇게 계속 물가가 임금보다 더 오르면 서민들은 살지 못한다.
그런데 재정지출을 늘린다고 물가가 오를까? 경제학 기초과정을 공부한 독자라면 세로축이 물가인 그래프에서 엑스(X) 자로 포개진 두 개의 곡선을 기억할 법하다. 우상향하는 ‘총공급곡선’과 우하향하는 ‘총수요곡선’이 그것이다. 재정지출을 늘리면 총수요(상품 구매)가 늘어 총수요곡선이 우측 이동한다. 이때 두 곡선이 교차하는 새로운 균형점에서는 물가가 전보다 오르겠구나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면 성급한 판단이다. 경제활동 수준이 기존 성장 추세를 벗어나 침체 상태라면 총공급곡선이 수평선에 보다 가깝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침체 상태에서는 수주 증가에 맞춰 생산을 늘려도 단위노동비용(상품 단위당 인건비)이 오르지 않아서다. 그 경우 재정지출을 늘려도 물가 자극은 제한된다.
문제는 한국경제의 현 상황을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이와 관련해 국회예산정책처는 올해 성장률이 기존 성장 추세 2.2%의 절반인 1.1%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다른 전망기관도 결과는 비슷하다. 대표 경기지표인 선행지수와 동행지수의 순환변동치도 불황을 가리킨다. 심지어 한국 노동시장은 실질임금이 많이 떨어져서 단위노동비용 부담이 크지도 않다. 따라서 지금은 원자재 수급관리와 같은 공급 측 정책을 강화하는 가운데 오히려 재정총량을 적정 규모로 늘림으로써 민생을 지원하고 경제회복을 도모하는 편이 바람직할 수 있다. 그래야 부정적인 ‘이력 효과’(경제의 현 상황이 미래 성장 경로 자체를 변경시키는 효과)도 통제할 수 있다.
물론 그런 기초적인 사실을 설마 몰라서 재정지출이 물가를 올린다는 말이 나왔을 것 같지는 않다. 차라리 재정지출의 결과로 통화량(돈의 양)이 늘어나니까 물가가 오른다고 생각했을 수는 있겠다. 경제학에서는 그런 생각을 ‘화폐수량설’이라고 부른다. 정부가 지출을 하면 누군가는 소득이 늘어난다. 따라서 재정지출은 틀림없이 통화량을 늘린다. 그런데 통화량이 늘어난다고 물가가 오를까. 실제로는 경제학의 역사에서 화폐수량설만큼 여러 대가들이 그 비현실성을 끊임없이 비판했던 틀린 가설은 더 찾아보기 어렵다. 그 가설은 현대적인 내생화폐이론에 의해 이미 극복되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 곳곳에는 아직도 그 사고가 태곳적 화폐수량설로 세뇌되어 있다. 정책당국은 더 심하다. 제발 정부는 통화량 걱정은 한국은행에 맡기고 재정정책이나 똑바로 하시라.
그렇다면 혹시 정부 주장은 통화량을 배제한 순수 재정 요인 때문에 물가가 오른다는 이른바 ‘재정적 물가이론’을 근거로 한 걸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재정적 물가이론은 재정지출이 늘면 물가가 오른다는 주장이 아니다. 그보다는 정부의 미래 국채 상환 능력이 의심될 때 물가가 오른다고 보는 시각에 가깝다. 그 이론대로라면 그간의 감세를 되돌리고 증세를 하면 물가는 잡힌다. 주의할 점도 있다. 재정적 물가이론에 따르면 한국은행은 물가안정에 책임이 없고 따라서 독립성도 부여되지 않는다. 정부가 그런 것까지 알고 재정지출이 물가를 올린다고 주장했을지는 의문이다.
최근 물가 상승은 공공요금을 제외하면 석유나 농산물처럼 공급 측 여건에 따라 가격이 좌우되는 품목이 주도하고 있다. 재정의 효과는 일차적으로 공급이 아니라 수요에 작용하므로 그런 품목의 가격 상승이 재정지출 탓은 아니다. 정부가 나라살림을 긴축한다고 중동과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찾아올 리도 없다. 그럼에도 뜬구름 같은 이유를 대며 긴축재정 기조를 주문하는 보수 경제학자들의 변호론은 얼마나 곡학아세인가. 가령 지방교부세를 예산대로 지급하면 물가가 불안해진다는 뜻인가. 공공임대주택을 못 짓게 하면 물가가 안정된다는 것인가.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재정지출을 늘리면 물가가 오른다는 주장은 경제학 논리가 취약하고 한국경제의 현 상황에도 안 맞는 궤변이다. 진실은 반대다. 서민을 죽이는 진짜 범인은 부자와 재벌 세금 깎아주느라 침체 상태의 경제를 기어이 더욱 망가뜨리고 마는 긴축재정인 것이다.
나원준 경북대 교수·경제학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강혜경 “명태균, 허경영 지지율 올려 이재명 공격 계획”
- “아들이 이제 비자 받아 잘 살아보려 했는데 하루아침에 죽었다”
- 최현욱, 키덜트 소품 자랑하다 ‘전라노출’···빛삭했으나 확산
- 수능문제 속 링크 들어가니 “김건희·윤석열 국정농단 규탄” 메시지가?
- 윤 대통령 ‘외교용 골프’ 해명에 김병주 “8월 이후 7번 갔다”···경호처 “언론 보고 알아
- 이준석 “대통령이 특정 시장 공천해달라, 서울 어떤 구청장 경쟁력 없다 말해”
- “집주인인데 문 좀···” 원룸 침입해 성폭행 시도한 20대 구속
- 뉴진스 “민희진 미복귀 시 전속계약 해지”…어도어 “내용증명 수령, 지혜롭게 해결 최선”
- 이재명 “희생제물 된 아내···미안하다, 사랑한다”
- ‘거제 교제폭력 사망’ 가해자 징역 12년…유족 “감옥 갔다 와도 30대, 우리 딸은 세상에 없어